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CoC] 시로 - 자립법개론

페어/시로

by 시크SYK 2024. 12. 31. 21:07

본문

KPC PC
글로디스 마셜 프락시누스 "애쉬" 엑셀시어
시나리오 시나리오 링크 엔딩
자립법개론 https://www.postype.com/@greentealatte-alittleice/post/9335173 1
플레이 날짜 플레이 타임 트리거 요소
2024년 12월 31일 5시간반  

 

 

 
.
 
그 열차에서 내린 지가 한 달.
 
사실 그보다 더 되었을 수도, 덜 되었을 수도 있다.
 
생의 시계가 멈추기라도 한 것처럼 시간 감각이 제대로 서지가 않는다.
 
당신은 그저 어떻게든,
 
내리지 못한 이들이 쥐여준 생을 움켜쥐고,
 
실낱같은 호흡만을 이어가고만 있을 뿐이다.
 
그저 살아 있기에 살아갈 뿐인 삶.
 
오전 11시,
 
프락시누스 "애쉬" 엑셀시어.
 
무엇을 하고 있는가?
 
프락시누스 "애쉬" 엑셀시어:(정신없이 흘러간 한달이었다. 사실 내심 그걸 바라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책무로 꽉 들어찬 날들은 빠르게 보낼수록 감정은 희끄무레 해지기 마련이니까, 마치 고속 비행 중에 주변 사물이 뿌옇게 일그러지는 것처럼. 이제 며칠 후면 병원으로 복귀할 예정이었다. 비릿한 쇠 냄새와 서늘한 박하향, 그리고 부패한 체취가 뒤섞여 차가운 바닥에서 뒹구는 일상으로.
그 전에,
오전 11시. 서재 책상에서 서류를 정리하고 있었다. 윗선에 보고할 내용들로 빈틈없이 빼곡하게 적힌 글들.)
 
프락시누스 "애쉬" 엑셀시어:
듣기
기준치: 50/25/10
굴림: 19
판정결과: 어려운 성공
 
똑똑똑.
 
일상으로 복귀하려 하는 당신의 귀에,
 
평탄한 노크 소리가 들린다.
 
이 시간에, 대체 누구지?
 
프락시누스 "애쉬" 엑셀시어:(안경 내려두고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느린 걸음으로 현관문 앞에 다가선다. 신발장에 두었던 가죽장갑을 손에 끼고 외시경으로 바깥을 확인한다. 방문할 사람이 없는데, 오늘은.)
 
방문한 사람이 누군지는 몰라도 제법 짓궂다.
 
마치 일련의 행동을 예상이라도 한 것처럼,
 
손가락으로 외시경을 툭 막아뒀다.
 
프락시누스 "애쉬" 엑셀시어:(미간이 미미하게 지푸려졌다. 자연스레 품속의 지팡이를 그러쥔다.) 누구세요?
 
프락시누스 "애쉬" 엑셀시어:⋯⋯. (지나치게 익숙한 목소리 하나가 희끗한 기억과 감정을 잇는다.) —글, (혀끝에서 음절이 끊겼다. 더 이상 살아있지 않는 이름일 텐데⋯.)
⋯누군지 몰라도 변태같은 수법이네⋯⋯. (상체를 무르더니 두 번 뒷걸음치고 지팡이 끝을 문쪽으로 향하게 한다. 손목의 스냅 한 번으로 문이 열렸다.)
 
문밖의 그림자에게서 웃는 소리가 난다.
 
그 역시도 지나치게 익숙하다.
 
곧 문이 느리지 않은 속도로 열리면,
 
글로디스 마셜:오랜만이야.
크리스마스 인사를 놓쳤으니 새해라도 밝혀야지 싶어서.
 
그가 아주 자연스럽게 당신을 제치고 집안으로 들어간다.
 
정돈된 정장 차림에서 모종의 해방이라도 된듯한 흰 셔츠.
 
자연스럽게 내려온 머리칼 하며 부드럽게 풀린 표정 등이⋯
 
저건 틀림없이 그가 맞다.
 
조금 낯설지언정,
 
하지만 너는 분명, 죽었잖아.
 
있을 수 없는 상황을 마주한다.
 
프락시누스 "애쉬" 엑셀시어:
SAN Roll
기준치: 70/35/14
굴림: 56
판정결과: 보통 성공
 
이성 감소 없음
 
망연한 얼굴이 스치거나 말거나,
 
그는 집안을 가벼이 둘러본다.
 
곧 웃음기 섞인 한탄이 터져나온다.
 
글로디스 마셜:강박이라도 앓았어? 그 일을 다 겪은 인간치고 너무 깨끗하게 사는 거 아니야.
 
프락시누스 "애쉬" 엑셀시어:뭐야? (악취라도 맡은 듯 몇 걸음 더 멀어졌다. 여전히 지팡이는 겨눈 채로. 심령 현상이라고 치부하기에는 학창 시절부터 익숙하게 봤던 유령과 다르고. 환각이라고 진단내리기에는 마땅한 이유가⋯.) 냐고, 너⋯.
 
글로디스 마셜:(아주 익숙하진 않은 향을 폐부 가득 채운다. 혈향과 섞였던 게 이거였구나. 눈을 감고 있다가 뜨고 문득 뒤를 돌아보자니 제법 형형한 기운이 풍기는 것이었다.) 어떻게 소개해줘야 하지. 네가 아는 내가 어떤 모습일지 잘 모르겠다.
모 건설사의 최연소 임원이었던 인간. 스스로 미들네임에 낙인을 찍고 기차에 올라 내리지 못한 인간.
누구와 선택과목이며 동선이며 전부 겹친 바 있던⋯
글로-디스, (웃음소리가 번진다.) 마셜.
 
프락시누스 "애쉬" 엑셀시어:(탄식을 내뱉는다. 아주 무거운 무언가가 폐를 짓누르고 숨을 앗아간 기분이었다. 누군가의 호명으로 그 옆의 누군가가 고개를 든다. 함께 수업을 듣고 호흡을 함께 했으나 마지막 걸음을 함께하지 못했던. 내 몸이 새빨간 피를 흘리고 있을 때 처참한 형태로 썩어가고 있었던 무언가가.
본능적으로 거부감이 훅 끼쳤다. 그건 분명한 환각이었으니.)
디핀도, (웃고 있는 이의 옆 공간이 사선으로 잘려나가고 벽지가 크게 찢겼다.)
 
글로디스 마셜:(머리만 살짝 틀었다. 기울어진 몸 그대로 잠시간 바라보다가 멀끔한 모양새인 소파에 앉는다. 방금 막 절단 마법을 피한 사람치고는 몹시 태연하다.)
왜 그런 얼굴이지, 애쉬. 네 앞의 난 진짜야.
말했잖아, 신년맞이 정도는 같이 하고 싶어서 왔다고. (기차에 앉아 여유로이 차나 들이키던 누군가의 인영이 겹친다. 꼬라지 하고는, 이라고 말을 해버리고 싶어질지도 모르겠다.)
 
프락시누스 "애쉬" 엑셀시어:(가늘어진 시선이 상황을 훑는다. 여전히 무엇도 납득하지 못한 채 그 끝이 흔들렸다.) 죽은 사람을 부활시키는 마법은 없어. (문득 탈력감이 들어 팔을 도로 내린다. 잘려나간 무언가가 관자놀이를 날카롭게 쑤시는 것만 같았다. 호흡이 잦아드니 사고회로마저 느려진 탓인지, 대화가 통 이어지지 않는다.) 단원들이 내게 잘못 고한 게 아니면⋯. 살아있었던 거야? (실낱같은 목소리가 흔들렸던 건 바람이 담겨버린 탓이다.)
 
글로디스 마셜:(등받이에 몸을 붙이고 고개를 한 번 젖혔다. 시선이 천장을 향했다가 도로 굴러 하얀 인영에 꽂혔다.) 맞는 말이지. (그러나 환각이라고 단언하지도 않는다. 팔을 도로 내리는 모습 하며 이어지지 않는 대화와 영 멍해 보이는 얼굴⋯⋯. 안쓰럽다고 하기엔 자격이 없는 것 같아서 입을 다물기로 했다.) 아니. 걔네는 거짓말을 한 적이 없어. (몸이 앞으로 기운다.) 난 죽은 사람이 맞아. 성탄의 기적을 조금 늦게 잡았을 뿐이지. (옆자리 톡톡 친다. 집안이 통으로 흔들리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그러니까, 기차처럼.)
 
프락시누스 "애쉬" 엑셀시어:(시선이 노란 태양을 향한다. 희게 명멸할 것 같았으나 대신 바람이 잦아든 걸까, 진동이 서서히 사그라들었다.) 하⋯⋯. 그럼 난 지금 정말 시체와 대화를 하고 있는 건가? 내가 아직도 모르는 마법 세계의 면모가 있었군. (다시 한번 멀거니 바라보기만. 성탄이고 기차고 자꾸 좋지 못한 기억들을 연상케 해⋯⋯. 문득 입안이 바싹 마르고 혀가 뒤로 말려 들어가 목구멍을 막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뭐 마실래. 마실 수는 있어?
 
글로디스 마셜:내 존재에 대한 게 그렇게 중요한가. 시체는 아니라고 해둘게, 일단. (옆에 앉으라는 손짓에도 멀거니 서있기만 하면 손짓이 느리게 멎는다. 제 손끼리 만지작거리는가 하더니 고개를 저었다.) 곧 떠날 손님한테 뭘 대접까지 해. 됐으니까 청소나 좀 하자. 인간 사는 곳 같지가 않아.
 
집을 둘러본다.
 
분명 깨끗한데 청소를 하자고.
 
다른 의미로 인간 사는 곳 같지가 않긴 한데⋯
 
[글로디스 마셜]이 앉은 [소파],
 
먼지 한 톨 없어 보이는 [바닥],
 
방금까지 앉아 있던 [서재],
 
주방 쪽의 [테이블] 정도를 손볼 수가 있겠다.
 
그가 느리게 자리에서 일어난다.
 
바닥을 한 번 훑더니⋯
 
향이나 좀 나면 인간답겠다는 시답잖은 소리나 한다.
 
프락시누스 "애쉬" 엑셀시어:중요해, 적어도 나한텐. 죽은 사람이 시체가 아니면 뭔데, 유령? 저승에서 대우를 제법 잘해주나 봐, 때깔 한번 곱네. (시선이 이번에는 볕에 그을린 손에 머문다. 어떠한 충동이 일었다. 차마 입으로 담지 못할 류의. 의식의 밑면 아래로 꾹꾹 누르고 있자니 인영이 자리에서 일어난다. 헛웃음이 새어 나왔다.) 어딜 또 가려고. 항해는 이제 끝나지 않았어?
(시선이 같이 바닥으로 떨어진다. 발바닥이 유독 차다. 저도 모르는 사이에 새하얀 파도를 밟은 것 같았다.)
 
바닥에는 머리카락도 먼지도 없다.
 
다만,
 
벽면에 붙은 서랍장 쪽에서 반짝이는 무언가가 보이는 것도 같았다.
 
프락시누스 "애쉬" 엑셀시어:
관찰력
기준치: 25/12/5
굴림: 16
판정결과: 보통 성공
 
사건 직후 그의 사무실에서 가져왔던 물건.
 
변절자가 되어버렸지만 왜인지 버리지 않고 가지고 있던 것,
 
노란 브로치다.
 
아직 그의 시선은 그것에 닿지 못한 것 같다.
 
어떻게 할까?
 
프락시누스 "애쉬" 엑셀시어:(태워버린 줄 알았는데, 왜. 표정이 구겨진다.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는 태연한 낯이다.) 주방에 향초 있어.
 
글로디스 마셜:그래? 그럼, (발을 옮기다가 반짝이는 것과 눈이 마주쳤다.) 그건 잠깐 보류.
(금방 주워들고 살핀다. 먼지는 없었다.) 이상하다, 누가 다 태웠던 것 같은데. (웃음기 섞인 목소리. 마치 그걸 지켜봤다는 것처럼 짓궂다.)
 
프락시누스 "애쉬" 엑셀시어:(눈동자가 위쪽으로 굴러간다. 오늘따라 되는 일이 없어⋯. 입 밖으로 중얼거렸던 것 같기도 했다. 그런데 방금 물체를 만져서 들어 올린 건가?) 이것도 그 기적 중의 일부인가 보네. 가져도 돼.
 
글로디스 마셜:이유를 모르겠네. 네 거잖아. (내가 가져서 무엇 하냐는 것처럼, 영문을 모르겠다는 식으로 뱉고 서랍장 위에 도로 올려둔다. 노란 시선은 비슷한 빛깔을 한 브로치에 잠시간 꽂혔다가 친구에게로 향한다.)
그동안 어떻게 지냈어?
 
차분한 목소리다.
 
강박에 가깝게 깨끗한 집안을 본다면 알 법도 한데,
 
글로디스는 당신에게 조용히 물어온다.
 
그 입으로 직접 듣고 싶다는 것처럼.
 
프락시누스 "애쉬" 엑셀시어:필요가 없거든, 이제. (힘 실어 발음한다. 마법 주문을 외우듯, 스스로에게 되뇌는 것 같기도 했다. 시선 둘이 허공에서 올곧게 맞물린다. 아니, 그 너머를 보는 것 같기도 했다.) 바빴어. 해야 할 일이 무척이나 많았네. 그래도 제법 나쁘지 않은 나날이었지. 곧 다시 평화의 시대를 맞이할 생각에 매우 들뜬 편이야. (입매가 흔들린다. 어떠한 균열은 미소를 닮았다.) 는 어때.
 
글로디스 마셜:필요가 있을 수도 있지? 언젠가는. (핀란드는 다녀왔고? 힘 들어가지 않은 목소리로 가볍게 묻는다. 올곧게 마주한 것 같으면서도 엇갈리는 시선에 잠시 침묵한다.) 좀 쉬지 그랬어. 아, 내가 할 말은 아닌가⋯⋯. 그럼 이건 어때. 수습하느라고 고생 많았다. (농담인지 진담인지 구분이 가지 않는다. 입매는 흔들리지 않는다. 그러나 어떠한 미소는 이미 일어난 균열 위에서 피어나기 마련이고.) 뭘 물어? 하늘길 항해하다 왔어.
이제 끝내려고.
 
프락시누스 "애쉬" 엑셀시어:없을 걸, 어떤 연유로 돈이 궁하지 않는 이상⋯. (그러니까 오로지 금전적인 가치로만 보고 있다는 소리다. 아, 그래. 다녀왔지. 외로운 캐롤이 울렸어, 그런데 선물은 없더라. 착한 사람은 못 된 거지, 역시. 평이한 목소리가 이어진다.) 병 주더니 이제는 약도 주려고. 고마워. (그리고 이건 진담이 아니다. 녹음이 직선으로 꽂힌다, 친구의 초상에 혼돈되어 일렁이는 그릇된 무언가에게.) 영영 쉬러 간 줄 알았더니⋯. 왜?
 
글로디스 마셜:응. 어쨌든 필요할 수 있는 거지. (이러니저러니 어떤 연유로 필요하든 신경은 전혀 쓰이지 않는다는 것 같다. 이어지는 평이한 목소리에는 고개나 느리게 끄덕인다. 역시 보이지 않았구나. 제 손을 들어 슥 살펴보는 모양새였다. 점점 올라가던 것이 햇살 가리듯 눈가에서 멎는다. 틈새로 직선으로 꽂히는 녹음을 본다, 꿰뚫린다⋯⋯.) 글쎄.
보다시피 기적이 일어났기 때문에 널 찾았는데.
왜 하필 너였는지는 잘 모르겠어.
 
서랍장에서 몇 걸음 떨어진 그가 다시 소파 등받이를 손바닥으로 쓸어냈다.
 
부드럽기만 한 감촉에 제 손바닥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그의 인영 너머로,
 
전에 갈무리해뒀던 문서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정신과 쪽 동료에게 부탁했던 케이스 자료다.
 
뻔하다.
 
불면증 관련 이야기가 빼곡하다.
 
프락시누스 "애쉬" 엑셀시어:
기준치: 60/30/12
굴림: 3
판정결과: 극단적 성공
 
자연스럽게 다가가 자료를 입수한다.
 
글로디스 마셜:⋯⋯뭐야? 언제부터 거기 있었어.
 
품에 안긴 자료에 꽂힌 시선.
 
프락시누스 "애쉬" 엑셀시어:내가 물을 질문인데. 손님치고 너무 당당한 거 아니야? (시야 끝에 손에 들린 자료가 보인다.)
 
글로디스 마셜:음. (⋯) 미안해? 지금부터라도 집들이라 치면 안 되나. (깔끔하게 포기했다.)
 
프락시누스 "애쉬" 엑셀시어:초대한 적도 없는데? (나가란 소리는 없다, 일단⋯. 대신 앞이마를 짚는다. 그러니까 정리하자면,) 어떤 기적이 일어나서 지금 내 눈앞에 있고, 보아하니 이승의 것들과 상호 작용도 가능한 상태인데. 왜인지는 모르겠다, 그런데 곧 다시 떠날 예정이다⋯. 맞아?
 
글로디스 마셜:(나가란 소리는 없으니 더 머물기로 한다. 어깨 으쓱이며 능청스럽게 웃기나 한다.) 그래. 머리 좋네, 나랑 다르게. 하나 추가해주자면야 떠나는 건 온전한 내 선택은 아니야. 남은 시간이 하루라는 것만 알아둘래.
 
프락시누스 "애쉬" 엑셀시어:(느릿느릿 손을 내린다. 왠지 속이 아주 뒤틀리는 기분이 들어서. 비릿하게 웃는다.) 아니, 선택이 될 수 있지. 지금이라도 나갈래? 그러면 악몽이 아닌 백일몽이라고 치부할게.
 
글로디스 마셜:⋯⋯.
하하, 매정하기는⋯.
내가 진짜 싫어진 모양이지, 10년이 무색하게.
나가줄게, 알았어⋯. 밥이나 제대로 먹는지만 확인하고.
 
프락시누스 "애쉬" 엑셀시어:내가 널 좋아했을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 우습네⋯. (이제는 현실을 지나 과거까지 부정하려 든다. 짧은 웃음소리가 뱉어진다.)
이건 죄책감이야?
 
글로디스 마셜:아, 이제 짝사랑 방향이 바뀐 거야? 적응할 시간 좀 주지. (부정을 구태여 정정해주지 않는다. 이제 본인 쪽에서의 호의를 첨언하기까지. 웃음소리가 들리면 외려 내내 웃고 있던 얼굴이 미묘하게 침체된다.) 아니.
미련이야.
 
주어가 불분명하다.
 
미련을 품은 게 그래서 누구라는 건지.
 
약간 침체되어 있던 얼굴은 금방 되돌아온다.
 
빨리 나가줘야겠다는 진담 반 섞인 말이 이어지고,
 
글로디스 마셜:잠깐 실례.
 
주방에 발을 들인 그는 멀끔한 찬장을 살핀 후,
 
문제가 없음을 확인하고서 냉장고를 열었다.
 
아마 여기서부터 꼬일 것이라는 직감이 든 건 틀리지 않았을 테다.
 
1인 가구인 것을 감안해도 빈 곳이 너무 많은 냉장고를 가만 보던 그가 고개를 돌린다.
 
글로디스 마셜:제안 하나 하지.
식재료만 사다 넣고 깔끔하게 사라져줄게.
 
프락시누스 "애쉬" 엑셀시어:(첨언 들으면 눈살이 가늘어진다. 입술은 미처 적응하지 못하여 여전히 웃는 모양새였으니) ⋯징그러워⋯. (찡그린 듯한 미소다.) 좀, 이봐. (뒤늦게 발걸음 떼었으나 따라잡지는 못한다. 다리의 오래된 흉터 때문만은 아니었다.)
갈래를 도저히 못 잡겠다. 이건 대체 무슨 미련이지?
 
글로디스 마셜:보이잖아, 너에게는 특히나 더 명확하게. 이방인으로서 이방인을 알아보지 못한 것에 대한 회한이라 해두자.
그래서. 제안은 받아들이는 걸로 알아도 돼?
 
프락시누스 "애쉬" 엑셀시어:⋯⋯.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식재료 정도를 사다 두는 건⋯. 근데 무엇이 이렇게 발걸음을, 입술을 떼기 어렵게 만드는 건지.) ⋯⋯그래, 마켓이 어디에 있는 줄은 알아? ⋯아니, 같이 가지. 길이라도 잃어서 제때 저승을 못 찾아가면 곤란하잖아. (겉옷 걸어두었던 서재로 향한다.)
 
글로디스 마셜:(승낙이 떨어지면 그대로 입매가 호선을 그린다. 살짝 떨어지는 시선은 발보다 조금 먼 저 뒤의 바닥에 닿는다. 미련하다.) 이것저것 실어야 하니까 차로 가. (물론 제 차는 아닐 예정이다. 당연하게도. 서재로 따라가려다 걸음을 멈추고 얌전히 거실에서 기다린다.)
 
프락시누스 "애쉬" 엑셀시어:뭘 대체 얼마나 사오려고⋯. 돈은 있고? (시선이 가늘어진다. 문을 열어둔 채 서재로 들어선다.)
 
글로디스 마셜:있겠어? 온전히 네가 먹을 것들이야. (팔짱을 낀 채 뒷모습에 대고 당당하게도 말했다.)
 
프락시누스 "애쉬" 엑셀시어:(서재에서 옷만 챙겨서 나온다.) 거기서는 배 곯을 일은 없나보다?
 
글로디스 마셜:아까부터 거기, 거기⋯ 하는데. 사후세계를 믿어서 하는 말이야? (괜히 기웃거린다. 느리게 나가는 발걸음.)
 
프락시누스 "애쉬" 엑셀시어:먼저 언급한 건 너였던 걸로 기억하는데. (거리가 통 가까워지지 않는다. 부러 느리게 걷고 있었다.) 딱히 안 믿어. 묻는 건 그냥, 바람이지.
 
글로디스 마셜:죽은 후에 말인데, 딱히 어딘가에 도달한 적 없어. 발이 땅에 닿지 않았다뿐이지 내내 이승이었다고. (조금 더 나아가 생각하면 여행을 지켜보는 것도 가능했다는 말을 쉽게 뱉었다.) 그래봐야 약 한 달이긴 했는데 말 들어주는 사람 없으니까 좀 외롭더라.
 
프락시누스 "애쉬" 엑셀시어:⋯생자는 못 보는 곳에서 계속 지켜보고 있었다? 왠지 박탈감 드는데. (정말 기분이 좋아보이는 낯은 아니다. 아파트 주차장을 가로질러 검은색 세단 앞에 멈추어선다.) 10년을 그렇게 살아왔으며 새삼스레. 그래서 이제는 좀 덜 외롭나?
 
글로디스 마셜:계속 너한테만 붙어있었다는 생각은 접어둬⋯⋯. 나도 지켜보고 싶은 사람이 더 있긴 했을 것이 아니야. (그래봐야 정말 얼마 없다. 아무것도 모르는 채 돌연 아들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부모나 지켜봤던가.) 그러게, 새삼스럽게. 진작 이런 기분을 알았으면 좀 달리 살았을까 싶어. (또 그 후련한 얼굴이다. 세단을 보고 썩 괜찮은 차라는 듯 휘파람이나 한 번 분다.)
 
프락시누스 "애쉬" 엑셀시어:안 했어, 그정도로 자의식이 크지는 않아⋯⋯. 게다가, 내가 뭐라고? (자조적인 웃음이 잇따른다. 열쇠로 문을 열고 안쪽에서 잠금장치를 푼다. 타라고 말하려고 고개 들었다가 표정 마주치고 멈춘다. 아,) 젠장. 중고차고 운전실력 형편 없으니까 적당히 하고 타. 하루가 아니라 몇 분 안에 떠나게 될 수도 있거든?
 
그가 콧잔등을 찡그리듯 웃는다.
 
딱히 모방하려 한 건 아닌 것 같은데 무언가와 아주 닮았다.
 
마켓은 집에서 차를 타고 10분 거리다.
 
차창 밖으로 익숙한 풍경이 스친다.
 
글로디스는 창밖을 바라보다 문득 당신과 눈을 마주한다.
 
그러고 보니 오늘 하루뿐이랬나⋯
 
주어진 시간이고 뭐고, 왜 또 떠나려는 건지.
 
기어 잡은 하얀 손에 그의 손이 살짝 스친다.
 
안심을 시키려는 의도인가.
 
딱히 그런 게 아니라고 할지라도⋯⋯
 
⋯⋯
 
글로디스의 상이 이지러진다.
 
눈앞이 흐려진다.
 
눈물이 나오는 건가?
 
아니,
 
그보다는 보다 더 암전에 가까운⋯⋯
 
눈을 뜨면 온전한 백색의 공간이다.
 
주위를 둘러봐도 상하좌우 모든 것이 백색이다.
 
바닥이 바닥인지도 의심이 간다.
 
기이하기 그지없다.
 
프락시누스 "애쉬" 엑셀시어:
SAN Roll
기준치: 70/35/14
굴림: 77
판정결과: 실패
 
이성 1 감소
 
프락시누스 "애쉬" 엑셀시어:
지능
기준치: 70/35/14
굴림: 60
판정결과: 보통 성공
 
프락시누스 "애쉬" 엑셀시어:(시야가 진동한다. 몸이 휘청인 건지 바닥이 흔들린 건지 확신할 수 없어 한걸음 앞으로 내딛어본다.)
 
앞으로 나아간다.
 
전진하는 건지 후진하는 건지⋯
 
측면으로 나아가는 건지.
 
아무것도 모르겠다.
 
그러다 어느 순간 눈앞에 흰 테이블이 놓인 것을 확인할 수가 있다.
 
이게 테이블인지조차⋯ 어떻게 인지했는지는 모르겠으나,
 
하여튼 그곳에 놓여있을 뿐이다.
 
테이블 위에는 종이 한 장이 놓여 있다.
 
프락시누스 "애쉬" 엑셀시어:(누가 시킨 것처럼 종이를 쥐어서 읽는다.)
 
프락시누스 "애쉬" 엑셀시어:(큰 감상은 없었다. 그야, 이건 그냥 꿈 아닌가⋯. 종이를 뒤집어서 테이블 위에 둔다.)
 
내용을 다 읽고 나면 문득 백색의 공간이 뒤틀린다.
 
♬-♪
 
어렴풋하면서도 익숙한 소리가 체신을 흔든다.
 
어느순간 수면 밖으로 끌어내지듯 갑작스레 정신이 든다.
 
이건 당신의 전화벨 소리다.
 
글로디스 마셜:애쉬. 괜찮아?
 
조수석에 앉은 글로디스가 제법 당혹스러운 눈길을 준다.
 
휴대폰을 확인하면 그저 스팸 전화임이 조금 신경질적인 부분이 되겠다.
 
프락시누스 "애쉬" 엑셀시어:(눈살을 찌푸린다. 시린 감각이 일었다.) 괜찮아⋯. (전화는 받지 않고 끊어버린다.)
 
전화를 끊을 즈음 고개를 든 글로디스가 말한다.
 
글로디스 마셜:다 온 것 같은데. 내릴까⋯.
 
프락시누스 "애쉬" 엑셀시어:(시선이 창밖을 향한다. 어느새? 능숙하게 주차하고 기어를 바꿔둔다. 바로 내리지는 않고 운전대 잡은 손등에 얼굴 묻더니 긴 한숨 내뱉었다.) 내려.
 
글로디스 마셜:그렇게 까칠하게 말하지 않아도 내릴 줄 알아. (어깨 툭툭 쳐주고 순순히 내렸다.)
 
경쾌한 음악이 흘러나오는 곳.
 
가장 큰 고민거리라고는, 오늘 저녁에 무엇을 먹을지⋯
 
이게 나을지 저게 나을지 고르는 곳이 고작인 장소다.
 
아무래도 장바구니보다는 쇼핑카트가 나을 테다.
 
프락시누스 "애쉬" 엑셀시어:(아까 닿았던 게 착각이 아니었구나. 곁눈질로 보더니 쇼핑카트를 가져온다.)
 
글로디스 마셜:(식료품 코너는 어디쯤이지. 자연스럽게 앞서 걷는다.)
 
프락시누스 "애쉬" 엑셀시어:이러니까 놀러 온 것 같네. (중얼거리며 뒤따라간다.)
 
글로디스 마셜:(중얼거리는 소리에 고개 돌리지 않고 짧게 안도한다. 한순간 번지는 건 덧없는 미소다. 곧 진열된 육류를 살피다가 양고기와 소고기 중 고민하는 모양새가 된다.) 특별히 좋아하는 류가 있던가?
 
프락시누스 "애쉬" 엑셀시어:(뒤통수를 뚫어져라 쳐다보더니 금새 따라잡는다.) 뭐 할려고? (자연스레 양고기 쪽으로 시선이 튼다.) 크게 상관없어.
 
글로디스 마셜:(한 번 흘긋 살피고 양고기 담는다. 가볍게 조리할 수 있을 육류도 한두 팩 넣었다.) 아침은 챙겨 먹나?
 
프락시누스 "애쉬" 엑셀시어:(눈썹 까닥인다.) 진짜 냉장고를 꽉 채워둘 셈인가. 시간 있으면 먹어. 요즘은 없는 편이고.
1인 가구에 그렇게 많이 사둬봤자 쓰레기통으로 들어갈 텐데.
 
글로디스 마셜:삼시세끼 제대로 챙기면 일주일 안에 사라질 양이야. (반박하는 어조가 강하진 않다. 마저 야채 코너로 이동해 양파와 감자 따위를 담는다.)
아침 거르지 말고. (토스트용 식빵도 툭⋯)
 
프락시누스 "애쉬" 엑셀시어:(영 탐탁지 않은 듯한 표정으로 보나 이번에도 말리지는 않는다. 어차피 처분은 네가 떠난 후에 할 테니까.) 어느 문화권에서는 유령을 위해 음식을 차린다는데. 하면 먹나?
 
글로디스 마셜:그거 우리 얘긴가? (아닐 가능성도 있으나 멕시코 문화와의 공통점을 찾았으므로 제법 반갑다는 얼굴이 되었다.) 글쎄. 죽은 자의 날 이후에 죽어버려서 실제로 손이 닿을지는 모르겠네.
차려주면 먹어보지, 뭐.
 
프락시누스 "애쉬" 엑셀시어:우리 집은 일단 안 하는데⋯. (멀건 웃음소리.) 유령이 만지고 간 음식은 안 썩어? (그리고 좀 너무한 소리를⋯ 아까부터 하고 있었다.)
 
글로디스 마셜:그럼 멕시코 사람들은 그 축제 때마다 썩은 음식 치우느라 고생하게? (황당하다는 낯짝이다.) 싫으면 강요 안 한다, 뭐.
 
프락시누스 "애쉬" 엑셀시어:하하, 그렇네⋯. 실언을 했어. 그정도의 선심이야 써줄 수 있는데. (짧은 정적이 흐른다. 발걸음은 유지한다.) 되살아날 수 있다면, 그러고 싶어?
 
글로디스 마셜:(대수롭지 않게 어깨 으쓱이고 식빵 근처에 있던 휘낭시에까지 야무지게 담았다.) 그런 걸 갑자기 왜 물어? 진짜 미련 생기게.
후회가 없다고는 못하겠는데⋯⋯.
되살아나고 싶진 않아, 이제 와서.
(멋쩍잖아. 장까지 봐줬는데? 농담 덧붙인다. 분위기 풀어보겠다고 한 건데 됐을지는 모르겠다.)
 
프락시누스 "애쉬" 엑셀시어:
지능
기준치: 70/35/14
굴림: 29
판정결과: 어려운 성공
 
시선에 문득 쇼핑카트 속 내용물이 보인다.
 
어느것 하나 '애쉬'를 위하지 않은 것이 없다.
 
그리고 깨닫는다.
 
그 안에 '글로디스'를 위한 것은 없다.
 
현실이 물밀듯이 덮쳐온다.
 
글로디스 마셜을 볼 수 있는 건 정말 오늘 하루뿐이다.
 
어렴풋이 꿈 속의 주문이 떠오른다.
 
이런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을 그는 알까?
 
'애쉬'는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다정하게 차곡차곡 준비되어가는 이별을,
 
이번에는 바로 맞이할 각오가 되었나?
 
아니라면⋯⋯
 
상념에 빠진 당신을 글로디스가 툭 건드린다.
 
글로디스 마셜:돌아가자. 이정도면 한동안 억지로라도 굶진 않겠어.
 
귀찮아도 꼬박꼬박 먹으라는 가벼운 어조가 이어진다.
 
제법 심란했을지도 모르겠다.
 
차로 돌아간 후 창밖으로 보이는 다홍빛의 노을이,
 
집까지 가는 내내 몸을 온통 적셔놓았으니까.
 
시간이 언제 이렇게 됐지.
 
하루가 끝나간다.
 
프락시누스 "애쉬" 엑셀시어:(수평선 너머로 지는 태양과 함께 기분이 수면 아래로 느리게 가라앉는다. 함께 있다 보니 살아있을 때와 별반 차이가 없어서 어떤 착각이라도 한 모양이다, 아주 멍청하게.)
 
'우리'는 집으로 돌아왔다.
 
이런저런 음식으로 가득한 장바구니를 내려두고,
 
글로디스는 이곳저곳 빈 냉장고를 꼼꼼하게 채워넣기 시작한다.
 
냉장실, 냉동실, 찬장.
 
그의 손이 닿지 않는 구석이 없다.
 
허리를 편 글로디스는,
 
시계를 한 번 보더니,
 
주저하던 입을 뗀다.
 
글로디스 마셜:나 이제 간다? 약속했으니까.
 
프락시누스 "애쉬" 엑셀시어:(느리게 입술 뗀다.) 다음 도착지는 어디야?
 
글로디스 마셜:그걸 말해줘야 네 마음이 좀 편해?
마지막의 마지막, 종착지. 안식이지.
 
프락시누스 "애쉬" 엑셀시어:편해보여? (웃는다⋯. 그래, 무력감에 버둥거리는 것도 포기한 채 가라앉는 것도 일종의 편함이라면.) 내가 차린 음식은 못 먹겠네, 그럼. 실력이 나쁘지는 않는데⋯.
 
글로디스 마셜:왜 못 먹는다고 생각하지. 타향 문화에 좀 익숙해져 봐. (쿡쿡 웃는다. 어딘가 허탈한 것 같기도 하고⋯) 오늘 이후로는 차려줄 생각 없나 봐.
 
프락시누스 "애쉬" 엑셀시어:내가 왜. 무엇을 위해서? (착각이다, 인영이 빛 속에서 흐트러지는 것 같던 건.) 종착지에 가서도 이곳으로 돌아올 수 있겠어? 기차는 이미 떠났는데.
 
글로디스 마셜:너를 위해서. (를 위해 차리라는 말은 하지 않는다. 단답 이후 집안을 한 번 더 눈으로 훑는다.) 내 비행 센스를 얕보지 마, 애쉬.
(현관에서 발을 톡톡 찬다.) 진-짜 갈게? 더 할 말 있고?
디핀도는 거절할게.
 
프락시누스 "애쉬" 엑셀시어:그러니까 네가 뭔데 자꾸 나를 위하냐고⋯. 죽었을 때 머리가 다친 건 회복이 안 되나? 정말 날 좋아하기라도 해? (그 자리에 뿌리 내린 듯 미동도 없이, 손끝만이 움직인다. 다시 한번 충동이 일었다. 어떠한, 불순한 충동이⋯.)
 
글로디스 마셜:내가 내 주제를 모르고 행동하는 건 예나 지금이나 같아. 그리고⋯ 죽을 때 머리는 멀쩡했거든. 좋아하다가 막상 돌려받으니까 엄청 징그러워? (옅은 숨을 툭 뱉는다.)
그때 겨우 살려둔 게 허무하게 죽어버려서 짜증나는 건 알겠어. 그래도 마지막인데 좀 웃어줄래, 그런 얼굴 안 어울리거니와⋯ (못생겼어. 속닥거린다.)
 
프락시누스 "애쉬" 엑셀시어:⋯진짜 어떻게 한번은 좀, 고분고분하게 굴어줄 수는 없어? 이러니까 자꾸 나도 주제를 모르고 행동하게 되잖아.
(노란 빛이 전신을 날카롭게 찌른다. 아마도 그 때문이었을 것이다, 두 눈에서 무언가가 흘렀던 건. 닳아서 사라질까 차마 입안에 담지도 못했던 이름을 기어코 뱉어낸 건.) 글로디스.
(허공에 흩어질까 소금기에 흠뻑 적신 후에야 흘러내리는 소리마디가 있었다.) 나는 그냥,
 
글로디스 마셜:⋯⋯. (현관문 쪽으로 반쯤 틀려있던 몸이 도로 그를 바라보고 섰다. 환시인가? 평생 허울 좋은 거짓만 내비치고 살 것 같던 인간이 울고 있었다. 일순 망자의 낯이 일그러졌다. 일말의 미안함, 체념, 슬픔, 죄책감⋯ 눈을 한 번 감았다 뜨고서 느린 걸음으로 다가가 두 손으로 뺨을 감싼다.)
(손이 목뒷덜미를 쥔다. 기도를 열고 몸을 기울인다. 푸른 녹음으로 기우는 영광이, 제멋대로 입을 맞추고 숨을 불어넣는다. 날숨 하나에 박동 둘. 이제 쇳소리는 없다. 숨소리가 귓가에 울리고 입안 가득 절망의 향이 밀려오면 문득 생이 정말 불합리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가늘고, 길면서도, 괴롭기 그지없도록.)
(간절히 바라던 것처럼 맞대고 있던 입이 떨어진다. 소년은 생존할 것이다. 들려주소서, 무사 여신이여. 누군가들을 치유하면서도 본인은 방황을 멈추지 못한 그 사람의 이야기를. 오디세이아는 이렇게 전이된다.)
 
프락시누스 "애쉬" 엑셀시어:(손끝의 충동은 사라지지 않는다, 목구멍을 타고 넘어가 발화까지 해버렸으므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은 이어진다. 숨에서 숨으로, 불안정한 태로. 젖은 속눈썹이 잘게 떨린다. 희끗한 시야로 한참을 바라보더니 그때 쥐어내지 못한 목 대신으로 품에 끌어안는다. 조금 아플 정도로 힘을 주고 나서야, 차라리 어디 하나가 부러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잠깐 했다. 폐부를 둘러싸고 있는 갈비뼈를 하나 꺼내 새 삶을 빚었던 것처럼.) 너를 증오해.
(그 어떤 발언도 행위도 존재통을 덜어 주지는 않을 것이다. 그저 꿰뚫린 채 있겠다면 적어도 함께 꿰뚫렸으면 해서. 머리부터 발 끝까지 피를 뒤집어 쓴 것처럼 체온이 올랐다. 푸른 어스름에 열병이라도 걸린 건지. 발끝에 새파란 파랑이 일었다. 맞대고 있던 온기는 밀물처럼 느리게 떨어진다.) 잘 가.
 
글로디스 마셜:(흩어지는 파도의 포말처럼 웃는다.)
안녕.
 
그가 다시 몸을 돌린다.
 
철컥,
 
탁.
 
두꺼운 철제 문이 잠금쇠를 걸어잠근다.
 
이토록 안과 밖이 선명하게 분리되었다 느끼기는,
 
처음일지도 모르겠다.
 
문득 집안을 둘러본다.
 
자연스럽게 시선 속으로 들어찼다고 보는 게 맞을지도 모르겠다.
 
어느 하나 그의 손이 닿지 않은 곳이 없다.
 
네가 뭐라고.
 
네가 뭐라고, '나 없이 잘 살라'며 이렇게 많은 걸 두고.
 
하지만 말이다.
 
당신은 이제 안다.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바라며,
 
무엇을 할 수 있는지.
 
그러니─
 
프락시누스 "애쉬" 엑셀시어는,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페어 > 시로' 카테고리의 다른 글

[CoC] 시로 - 결혼전야  (0) 2025.02.02
[CoC] 시로 - 연성궤도 1부: Emerald Link  (0) 2025.01.25
[CoC] 시로 - 거짓말쟁이 샐러맨더  (0) 2025.01.13
[CoC] 시로 - 침몰한 추억  (0) 2024.12.22
[CoC] 시로 - 창백한 체온  (0) 2024.12.19

관련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