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락시누스 "애쉬" 엑셀시어:(정신없이 흘러간 한달이었다. 사실 내심 그걸 바라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책무로 꽉 들어찬 날들은 빠르게 보낼수록 감정은 희끄무레 해지기 마련이니까, 마치 고속 비행 중에 주변 사물이 뿌옇게 일그러지는 것처럼. 이제 며칠 후면 병원으로 복귀할 예정이었다. 비릿한 쇠 냄새와 서늘한 박하향, 그리고 부패한 체취가 뒤섞여 차가운 바닥에서 뒹구는 일상으로.
그 전에,
오전 11시. 서재 책상에서 서류를 정리하고 있었다. 윗선에 보고할 내용들로 빈틈없이 빼곡하게 적힌 글들.)
글로디스 마셜:강박이라도 앓았어? 그 일을 다 겪은 인간치고 너무 깨끗하게 사는 거 아니야.
프락시누스 "애쉬" 엑셀시어:뭐야? (악취라도 맡은 듯 몇 걸음 더 멀어졌다. 여전히 지팡이는 겨눈 채로. 심령 현상이라고 치부하기에는 학창 시절부터 익숙하게 봤던 유령과 다르고. 환각이라고 진단내리기에는 마땅한 이유가⋯.)뭐냐고, 너⋯.
글로디스 마셜:(아주 익숙하진 않은 향을 폐부 가득 채운다. 혈향과 섞였던 게 이거였구나. 눈을 감고 있다가 뜨고 문득 뒤를 돌아보자니 제법 형형한 기운이 풍기는 것이었다.) 어떻게 소개해줘야 하지. 네가 아는 내가 어떤 모습일지 잘 모르겠다.
모 건설사의 최연소 임원이었던 인간. 스스로 미들네임에 낙인을 찍고 기차에 올라 내리지 못한 인간.
누구와 선택과목이며 동선이며 전부 겹친 바 있던⋯
글로-디스,(웃음소리가 번진다.)마셜.
프락시누스 "애쉬" 엑셀시어:(탄식을 내뱉는다. 아주 무거운 무언가가 폐를 짓누르고 숨을 앗아간 기분이었다. 누군가의 호명으로 그 옆의 누군가가 고개를 든다. 함께 수업을 듣고 호흡을 함께 했으나 마지막 걸음을 함께하지 못했던.내 몸이 새빨간 피를 흘리고 있을 때 처참한 형태로 썩어가고 있었던 무언가가.
본능적으로 거부감이 훅 끼쳤다. 그건 분명한환각이었으니.)
디핀도,(웃고 있는 이의 옆 공간이 사선으로 잘려나가고 벽지가 크게 찢겼다.)
글로디스 마셜:(머리만 살짝 틀었다. 기울어진 몸 그대로 잠시간 바라보다가 멀끔한 모양새인 소파에 앉는다. 방금 막 절단 마법을 피한 사람치고는 몹시 태연하다.)
왜 그런 얼굴이지,애쉬.네 앞의 난 진짜야.
말했잖아, 신년맞이 정도는 같이 하고 싶어서 왔다고. (기차에 앉아 여유로이 차나 들이키던 누군가의 인영이 겹친다.꼬라지 하고는,이라고 말을 해버리고 싶어질지도 모르겠다.)
프락시누스 "애쉬" 엑셀시어:(가늘어진 시선이 상황을 훑는다. 여전히 무엇도 납득하지 못한 채 그 끝이 흔들렸다.) 죽은 사람을 부활시키는 마법은 없어. (문득 탈력감이 들어 팔을 도로 내린다. 잘려나간 무언가가 관자놀이를 날카롭게 쑤시는 것만 같았다. 호흡이 잦아드니 사고회로마저 느려진 탓인지, 대화가 통 이어지지 않는다.) 단원들이 내게 잘못 고한 게 아니면⋯.살아있었던 거야?(실낱같은 목소리가 흔들렸던 건 바람이 담겨버린 탓이다.)
글로디스 마셜:(등받이에 몸을 붙이고 고개를 한 번 젖혔다. 시선이 천장을 향했다가 도로 굴러 하얀 인영에 꽂혔다.) 맞는 말이지. (그러나 환각이라고 단언하지도 않는다. 팔을 도로 내리는 모습 하며 이어지지 않는 대화와 영 멍해 보이는 얼굴⋯⋯. 안쓰럽다고 하기엔 자격이 없는 것 같아서 입을 다물기로 했다.) 아니. 걔네는 거짓말을 한 적이 없어. (몸이 앞으로 기운다.)난 죽은 사람이 맞아. 성탄의 기적을 조금 늦게 잡았을 뿐이지. (옆자리 톡톡 친다. 집안이 통으로 흔들리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그러니까,기차처럼.)
프락시누스 "애쉬" 엑셀시어:(시선이 노란 태양을 향한다. 희게 명멸할 것 같았으나 대신 바람이 잦아든 걸까, 진동이 서서히 사그라들었다.) 하⋯⋯. 그럼 난 지금 정말 시체와 대화를 하고 있는 건가? 내가 아직도 모르는 마법 세계의 면모가 있었군. (다시 한번 멀거니 바라보기만. 성탄이고 기차고 자꾸 좋지 못한 기억들을 연상케 해⋯⋯. 문득 입안이 바싹 마르고 혀가 뒤로 말려 들어가 목구멍을 막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뭐 마실래. 마실 수는 있어?
글로디스 마셜:내 존재에 대한 게 그렇게 중요한가. 시체는 아니라고 해둘게, 일단. (옆에 앉으라는 손짓에도 멀거니 서있기만 하면 손짓이 느리게 멎는다. 제 손끼리 만지작거리는가 하더니 고개를 저었다.) 곧 떠날 손님한테 뭘 대접까지 해. 됐으니까청소나 좀 하자. 인간 사는 곳 같지가 않아.
프락시누스 "애쉬" 엑셀시어:중요해, 적어도 나한텐. 죽은 사람이 시체가 아니면 뭔데, 유령? 저승에서 대우를 제법 잘해주나 봐, 때깔 한번 곱네. (시선이 이번에는 볕에 그을린 손에 머문다. 어떠한 충동이 일었다. 차마 입으로 담지 못할 류의. 의식의 밑면 아래로 꾹꾹 누르고 있자니 인영이 자리에서 일어난다. 헛웃음이 새어 나왔다.) 어딜 또 가려고. 항해는 이제 끝나지 않았어?
(시선이 같이바닥으로 떨어진다. 발바닥이 유독 차다. 저도 모르는 사이에 새하얀 파도를 밟은 것 같았다.)
프락시누스 "애쉬" 엑셀시어:필요가 없거든, 이제. (힘 실어 발음한다. 마법 주문을 외우듯, 스스로에게 되뇌는 것 같기도 했다. 시선 둘이 허공에서 올곧게 맞물린다. 아니,그 너머를 보는 것 같기도 했다.) 바빴어. 해야 할 일이 무척이나 많았네. 그래도 제법 나쁘지 않은 나날이었지. 곧 다시 평화의 시대를 맞이할 생각에 매우 들뜬 편이야. (입매가 흔들린다. 어떠한 균열은 미소를 닮았다.)너는 어때.
글로디스 마셜:필요가 있을 수도 있지? 언젠가는. (핀란드는 다녀왔고? 힘 들어가지 않은 목소리로 가볍게 묻는다. 올곧게 마주한 것 같으면서도 엇갈리는 시선에 잠시 침묵한다.) 좀 쉬지 그랬어. 아, 내가 할 말은 아닌가⋯⋯. 그럼 이건 어때.수습하느라고 고생 많았다.(농담인지 진담인지 구분이 가지 않는다. 입매는 흔들리지 않는다. 그러나 어떠한 미소는 이미 일어난 균열 위에서 피어나기 마련이고.) 뭘 물어? 하늘길 항해하다 왔어.
이제 끝내려고.
프락시누스 "애쉬" 엑셀시어:없을 걸, 어떤 연유로 돈이 궁하지 않는 이상⋯. (그러니까 오로지 금전적인 가치로만 보고 있다는 소리다. 아, 그래. 다녀왔지. 외로운 캐롤이 울렸어, 그런데 선물은 없더라. 착한 사람은 못 된 거지, 역시. 평이한 목소리가 이어진다.) 병 주더니 이제는 약도 주려고.고마워.(그리고 이건 진담이 아니다. 녹음이 직선으로 꽂힌다,친구의 초상에 혼돈되어 일렁이는 그릇된 무언가에게.) 영영 쉬러 간 줄 알았더니⋯. 왜?
글로디스 마셜:응. 어쨌든 필요할 수 있는 거지. (이러니저러니 어떤 연유로 필요하든 신경은 전혀 쓰이지 않는다는 것 같다. 이어지는 평이한 목소리에는 고개나 느리게 끄덕인다.역시 보이지 않았구나.제 손을 들어 슥 살펴보는 모양새였다. 점점 올라가던 것이 햇살 가리듯 눈가에서 멎는다. 틈새로 직선으로 꽂히는 녹음을 본다, 꿰뚫린다⋯⋯.) 글쎄.
프락시누스 "애쉬" 엑셀시어:초대한 적도 없는데? (나가란 소리는 없다, 일단⋯. 대신 앞이마를 짚는다. 그러니까 정리하자면,) 어떤 기적이 일어나서 지금 내 눈앞에 있고, 보아하니 이승의 것들과 상호 작용도 가능한 상태인데. 왜인지는 모르겠다, 그런데 곧 다시 떠날 예정이다⋯. 맞아?
글로디스 마셜:(나가란 소리는 없으니 더 머물기로 한다. 어깨 으쓱이며 능청스럽게 웃기나 한다.) 그래. 머리 좋네, 나랑 다르게. 하나 추가해주자면야 떠나는 건 온전한 내 선택은 아니야.남은 시간이 하루라는 것만 알아둘래.
프락시누스 "애쉬" 엑셀시어:(느릿느릿 손을 내린다. 왠지 속이 아주 뒤틀리는 기분이 들어서. 비릿하게 웃는다.) 아니, 선택이 될 수 있지.지금이라도 나갈래?그러면 악몽이 아닌 백일몽이라고 치부할게.
글로디스 마셜:⋯⋯.
하하, 매정하기는⋯.
내가 진짜 싫어진 모양이지, 10년이 무색하게.
나가줄게, 알았어⋯. 밥이나 제대로 먹는지만 확인하고.
프락시누스 "애쉬" 엑셀시어:내가 널 좋아했을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 우습네⋯. (이제는 현실을 지나 과거까지 부정하려 든다. 짧은 웃음소리가 뱉어진다.)
이건 죄책감이야?
글로디스 마셜:아, 이제 짝사랑 방향이 바뀐 거야? 적응할 시간 좀 주지. (부정을 구태여 정정해주지 않는다. 이제 본인 쪽에서의 호의를 첨언하기까지. 웃음소리가 들리면 외려 내내 웃고 있던 얼굴이 미묘하게 침체된다.) 아니.
미련이야.
주어가 불분명하다.
미련을 품은 게 그래서 누구라는 건지.
약간 침체되어 있던 얼굴은 금방 되돌아온다.
빨리 나가줘야겠다는 진담 반 섞인 말이 이어지고,
글로디스 마셜:잠깐 실례.
주방에 발을 들인 그는 멀끔한 찬장을 살핀 후,
문제가 없음을 확인하고서 냉장고를 열었다.
아마 여기서부터 꼬일 것이라는 직감이 든 건 틀리지 않았을 테다.
1인 가구인 것을 감안해도 빈 곳이 너무 많은 냉장고를 가만 보던 그가 고개를 돌린다.
글로디스 마셜:제안 하나 하지.
식재료만 사다 넣고 깔끔하게 사라져줄게.
프락시누스 "애쉬" 엑셀시어:(첨언 들으면 눈살이 가늘어진다. 입술은 미처 적응하지 못하여 여전히 웃는 모양새였으니—)⋯징그러워⋯.(찡그린 듯한 미소다.) 좀, 이봐. (뒤늦게 발걸음 떼었으나 따라잡지는 못한다. 다리의 오래된 흉터 때문만은 아니었다.)
갈래를 도저히 못 잡겠다. 이건 대체 무슨 미련이지?
글로디스 마셜:보이잖아,너에게는 특히나 더 명확하게.이방인으로서 이방인을 알아보지 못한 것에 대한 회한이라 해두자.
그래서. 제안은 받아들이는 걸로 알아도 돼?
프락시누스 "애쉬" 엑셀시어:⋯⋯.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식재료 정도를 사다 두는 건⋯. 근데 무엇이 이렇게 발걸음을, 입술을 떼기 어렵게 만드는 건지.) ⋯⋯그래, 마켓이 어디에 있는 줄은 알아? ⋯아니, 같이 가지. 길이라도 잃어서 제때 저승을 못 찾아가면 곤란하잖아. (겉옷 걸어두었던 서재로 향한다.)
글로디스 마셜:(승낙이 떨어지면 그대로 입매가 호선을 그린다. 살짝 떨어지는 시선은 발보다 조금 먼 저 뒤의 바닥에 닿는다.미련하다.) 이것저것 실어야 하니까 차로 가. (물론 제 차는 아닐 예정이다. 당연하게도. 서재로 따라가려다 걸음을 멈추고 얌전히 거실에서 기다린다.)
프락시누스 "애쉬" 엑셀시어:뭘 대체 얼마나 사오려고⋯. 돈은 있고? (시선이 가늘어진다. 문을 열어둔 채 서재로 들어선다.)
글로디스 마셜:있겠어? 온전히 네가 먹을 것들이야. (팔짱을 낀 채 뒷모습에 대고 당당하게도 말했다.)
프락시누스 "애쉬" 엑셀시어:(서재에서 옷만 챙겨서 나온다.) 거기서는 배 곯을 일은 없나보다?
글로디스 마셜:아까부터 거기, 거기⋯ 하는데. 사후세계를 믿어서 하는 말이야? (괜히 기웃거린다. 느리게 나가는 발걸음.)
프락시누스 "애쉬" 엑셀시어:먼저 언급한 건 너였던 걸로 기억하는데. (거리가 통 가까워지지 않는다. 부러 느리게 걷고 있었다.) 딱히 안 믿어. 묻는 건 그냥, 바람이지.
글로디스 마셜:죽은 후에 말인데, 딱히 어딘가에 도달한 적 없어. 발이 땅에 닿지 않았다뿐이지 내내 이승이었다고. (조금 더 나아가 생각하면 여행을 지켜보는 것도 가능했다는 말을 쉽게 뱉었다.) 그래봐야 약 한 달이긴 했는데 말 들어주는 사람 없으니까 좀 외롭더라.
프락시누스 "애쉬" 엑셀시어:⋯생자는 못 보는 곳에서 계속 지켜보고 있었다? 왠지 박탈감 드는데. (정말 기분이 좋아보이는 낯은 아니다. 아파트 주차장을 가로질러 검은색 세단 앞에 멈추어선다.) 10년을 그렇게 살아왔으며 새삼스레. 그래서 이제는 좀 덜 외롭나?
글로디스 마셜:계속 너한테만 붙어있었다는 생각은 접어둬⋯⋯. 나도 지켜보고 싶은 사람이 더 있긴 했을 것이 아니야. (그래봐야 정말 얼마 없다. 아무것도 모르는 채 돌연 아들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부모나 지켜봤던가.) 그러게, 새삼스럽게. 진작 이런 기분을 알았으면 좀 달리 살았을까 싶어. (또 그후련한 얼굴이다. 세단을 보고 썩 괜찮은 차라는 듯 휘파람이나 한 번 분다.)
프락시누스 "애쉬" 엑셀시어:안 했어, 그정도로 자의식이 크지는 않아⋯⋯. 게다가, 내가 뭐라고? (자조적인 웃음이 잇따른다. 열쇠로 문을 열고 안쪽에서 잠금장치를 푼다. 타라고 말하려고 고개 들었다가 표정 마주치고 멈춘다. 아,)젠장.중고차고 운전실력 형편 없으니까 적당히 하고 타. 하루가 아니라 몇 분 안에 떠나게 될 수도 있거든?
글로디스 마셜:⋯⋯. (현관문 쪽으로 반쯤 틀려있던 몸이 도로 그를 바라보고 섰다. 환시인가? 평생 허울 좋은 거짓만 내비치고 살 것 같던 인간이 울고 있었다. 일순 망자의 낯이 일그러졌다. 일말의 미안함, 체념, 슬픔,죄책감⋯눈을 한 번 감았다 뜨고서 느린 걸음으로 다가가 두 손으로 뺨을 감싼다.)
(손이 목뒷덜미를 쥔다. 기도를 열고 몸을 기울인다. 푸른 녹음으로 기우는 영광이, 제멋대로 입을 맞추고 숨을 불어넣는다. 날숨 하나에 박동 둘. 이제 쇳소리는 없다. 숨소리가 귓가에 울리고 입안 가득 절망의 향이 밀려오면 문득 생이 정말 불합리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가늘고, 길면서도, 괴롭기 그지없도록.)
(간절히 바라던 것처럼 맞대고 있던 입이 떨어진다.소년은 생존할 것이다.들려주소서, 무사 여신이여. 누군가들을 치유하면서도 본인은 방황을 멈추지 못한 그 사람의 이야기를.오디세이아는 이렇게 전이된다.)
프락시누스 "애쉬" 엑셀시어:(손끝의 충동은 사라지지 않는다, 목구멍을 타고 넘어가 발화까지 해버렸으므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은 이어진다. 숨에서 숨으로, 불안정한 태로. 젖은 속눈썹이 잘게 떨린다. 희끗한 시야로 한참을 바라보더니 그때 쥐어내지 못한 목 대신으로 품에 끌어안는다. 조금 아플 정도로 힘을 주고 나서야, 차라리 어디 하나가 부러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잠깐 했다. 폐부를 둘러싸고 있는 갈비뼈를 하나 꺼내 새 삶을 빚었던 것처럼.)너를 증오해.
(그 어떤 발언도 행위도 존재통을 덜어 주지는 않을 것이다. 그저 꿰뚫린 채 있겠다면 적어도 함께 꿰뚫렸으면 해서. 머리부터 발 끝까지 피를 뒤집어 쓴 것처럼 체온이 올랐다. 푸른 어스름에 열병이라도 걸린 건지. 발끝에 새파란 파랑이 일었다. 맞대고 있던 온기는 밀물처럼 느리게 떨어진다.) 잘 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