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곳은 송전탑의 역할을 겸한 도시의 랜드마크로, 전망대와 각종 레저 시설, 쇼핑 센터들이 함께 자리잡은 유명 관광 시설입니다.
그러니 사람이 많은 거야 당연하지만⋯
한창 연말 시즌이라서일까?
오늘은 특히나 분위기가 더 들떠있는 것 같아요.
조금 더 걸어 알록달록한 장난감 가게 앞까지 도착하면,
리아를 닮았던 듯한 그림자는 완전히 사라지고 없습니다.
잘못 본 걸까?
그렇게 생각할 때 쯤.
리아 P. 아이아나:이안 씨? 여기서 뭐 해요?
뒤에서 누군가 당신을 툭 건들며 나타납니다.
리아입니다.
어라라, 어디에서 나타난거지?
리아와의 대화가 가능합니다.
이안 J. 휴고:으악. (토끼눈 뜨고 뒤돌아본다.) 어, 어디서 나타난 거예요? 또 그 귀걸이 썼지.
리아 P. 아이아나:이렇게 사람이 많은데요? 당신이 발견이 늦은 거라고요. 정말 현직 형사 맞나?(쿡쿡⋯)
이안 J. 휴고:(어이없다는 듯 눈살 가늘어진다. 그러나 가벼운 투⋯) 분명 조금 전에 저기 앞에 있었잖아요. (그림자가 사라졌던 쪽 손가락으로 가리킨다.)
리아 P. 아이아나:저기 앞에? (이안이 가리키는 곳 빤히 본다.) 어라, 전 반대쪽에서 왔는데? 여기 가게에서 나오는 길이었어요. (정 반대쪽 가리킵니다.) 도대체 누굴 보고 저랑 착각한 건가요? 눈썰미도 실격!
이안 J. 휴고:진짜? 정말요? (재차 묻는다. 리아야 신출귀물 하는 건 익숙했음에도⋯) 허 참 나. 유일하게 괴도의 정체를 아는 제가 눈썰미가 없는 거라면 이 세상 사람들 눈썰미는 다 죽은 거겠네요! 가게는 무슨 가게? (시선이 반대쪽을 향한다.)
리아 P. 아이아나:금발에 비슷한 옷이라도 봤나⋯ 보⋯ 죠? (무언가의 기시감에 느려지는 말과 이안에게 고정되는 시선⋯ 뭐지?) 네에 네, 그렇다고 쳐드릴게요. 이쪽은 그냥 기념품 가게였어요.
이안 J. 휴고:흔한 머리색은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이번에는 시선이 물 빠진 금색 머리카락 끝에 고정된 채 고개만 기울어진다. 뭐지?) 뭐, 만난 김에 같이 쇼핑이나 할까요. 혼자 다니려니 심심하던 차였거든요.
리아 P. 아이아나:그런가⋯ 앗, 그러고 보니 뭔가 이상하다 했어. 맨날맨날 검은색 옷만 입고 다니더니! (이안에게 냅다 삿대질!) 그리고 되게 한가하네요, 그 이야기 못 들었어요?
이안 J. 휴고:(쿨럭) 뭐, 뭐야?! 아니 저도 연말 즐길 줄 알거든요? 크리스마스 분위기 낼 줄 안다고요. 당신이야 말로 맨날 시-퍼런 옷만 입고 다니는 줄 알았더니? (갑자기 급해진 목소리⋯) 이야기는 무슨 이야기요?
리아 P. 아이아나:솔직히 완전히 무자각일 줄 알았어요. 왜 이렇게 사람이 많고 번쩍번쩍하지. 바보 같은 소리나 하고 돌아다니실줄 알았는데. 큼, 저야 늘 꾸미고 다녔으니까. 카지노 갈 때도 와인색 셔츠 입었었는데! 거참. (당신이 모르는 기색이자 표정이 미묘해진다.) 못 들었다니 안 말해주고 싶어지는데⋯
이안 J. 휴고:사람이 지나치게 어이가 없어지면 할 말도 안 떠오른다는 게 이런 의미에서 구나. 우와, 그랬어요? 눈썰미가 없어서 못 알아차렸네. 다음에는 기억에 잘 새겨지도록 무지개색 넥타이라도 해봐요. (이런 소리나⋯) 또 무슨 테러 예고라도 있었어요? 아니면 이제 곧 할 예정?
리아 P. 아이아나:무지개색 넥타이라니⋯ 구하기도 어렵겠는데요. 그래요, 크리스마스 정도는 기억하시는구나. 비록 당신도 저도 기분 낸 덕에 완전히 커플룩이 되어버렸지만. (그래도 싫다는 얼굴은 아니다.) ⋯예고장이 왔대요. 괴도의 예고장이라던데⋯ 제가 보낸 건 아니거든요?
이안 J. 휴고:아, 뭐 빵이 상했다고 했나⋯ (괴도는 당신인데.) 카드 같은 게 있었던 것 같기도. 당신이 보낸 게 아니었어요?
리아 P. 아이아나:(작게 한숨쉰다.) 24일 밤, 세상에서 가장 가치있는 것을 받으러 가겠다. 라는 예고장이 이 스카이 빌딩에 왔대요.
최근 스카이 빌딩에서 시즌맞이 크리스마스 빌리지라는 팝업 시설을 설치해서 중심에 세운 거대한 트리에 120캐럿짜리 핑크 다이아몬드를 장식해 두었다고 하더라고요. 그 크기와 전문가의 섬세한 세공 덕에 세계에서 가장 가치있는 보석이라며 유명해 이전부터도 화제였던 모양이지만⋯
스카이 빌딩 측이 수수께끼의 예고장을 내세워 마케팅을 시작한 탓에 더욱 열광을 끌어모으기 시작한 모양이에요. 자작이 아니냐는 논란도 있는 모양이지만 어쨌건 크리스마스와 보석과 괴도란 마음을 들뜨게 하는 단어들이니까요.
일련의 이야기를 마치면 오늘 이 곳에 특히 사람이 많은 것도 이해가 갑니다.
소문의 괴도가 진짜일지 아닌지를 확인하고 싶은 거겠죠.
겸사겸사 다이아몬드도 구경하고요.
이안 J. 휴고:아~. ⋯네? (이야기 다 듣고 나면 눈앞에 선 이 빤-히 응시한다. 다소 노골적일 정도로⋯) 이 전개 지나치게 익숙한데.
리아 P. 아이아나:⋯..전 사교도가 있는 곳에만 가거든요. (도끼눈 뜨고 마주본다.) 그리고 제 방식이랑 달라도 너무 다르고요. 괴도라는게 너무 좋게 보였던걸까⋯
이안 J. 휴고:또 모르죠? 사교도가 연관되어 있을지. (깜박. 너무 몰아갔나 싶어 멋쩍게 뒷목 긁는다.) 기껏 낸 휴가인데 반납해야겠네. 우연히 커플룩인 김에 동행하죠. 이런 이색 데이트도 괜찮으시다면.
리아 P. 아이아나:제발 그건 아니라면 좋겠네요. 크리스마스 이브정도는 평화롭게 보내고 싶어서요. (고개 절레절레.) 그래요 그럼. 마침 얼마 전에 여기에서 하는 전시전 티켓을 두 장 받았거든요. 어차피 여기저기 돌아다녀야 할 테니 잠시 가볼래요?
이안 J. 휴고:헐, 네! (아. 뒤늦게 헛기침한다.) 그, 수사에 도움이 돼서 좋은 거예요. 절대 신난 게 아니고⋯ 빨리 움직입시다. 빠듯하게 움직이면 크리스마스 당일 날은 평화롭게 보낼 수 있겠네요. (이제는 퍽 익숙한 모양새로 손 내민다.)
리아 P. 아이아나:제법 신나 보이는데. (안주머니에서 티켓을 꺼낸다.) 그냥 평범하게 신난다고 해도 좋아요, 연기에는 재능 없다니까 그러네. (손 위에 티켓 챡 놓아준다.)
이안 J. 휴고:(요새 물가가⋯ 많이 올랐나? 눈 부비작⋯) 당신은 어떻게 생각해요, 리아 씨? 돈으로 살 수 있는 것 중에 영원히 남는 게 있을까⋯ 아니면 어떤 은유 일려나. 동화니까.
리아 P. 아이아나:영원이라⋯ ⋯ ⋯
말 돌리지 마세요. (찌릿.)
⋯영원한 게 있을까요? 물건은 닳고 마음은 변하는 법이잖아요. 재미없는 대답을 하자면 다이아몬드? 적어도 죽을 때까지 변하지 않는다면 영원이라 불러도 좋지 않겠어요.
이안 J. 휴고:아, 마침 책이 여기 있네. (못 들은 척까지.) 다이아몬드도 시대에 따라 가치는 변할 텐데요. 양치기 할아버지가 주신 돈으로 고가의 보석을 살 수 있을지도 의문이고.
시계를 샀을지도 몰라요. 시간은 영원하다는 말 들어봤어요?
리아 P. 아이아나:⋯(계속 못 들은 척 하는 게 괘씸해서 발 한번 콱 밟아요) 책은 비닐포장이네요. 결말을 알고 싶으면 유료인듯 한데⋯ 살건가요? (책 이리저리 돌려보다가) 아무래도 그런가. 아이가 눈 위에 적은 소원은 행복이었으니까, 어쩌면 아이가 생각하는 가장 큰 행복을 샀을지도 모르죠. 그게 뭔진 모르겠지만.
이안 J. 휴고:(서점이라고 비명소리 삼킨다. 째려보는 건 덤.) ⋯기념품? 느낌으로 사죠, 뭐. 책은 남는 거니까. (계산대로 들고 가서 값을 지불한다.) 아이가 생각하는 가장 큰 행복⋯ 가족이랑 따뜻한 연말 보내기? 창작 및 예술에는 영 재능 없는 사람이라 이런 진부한 답밖에 없는데. (흠. 구매한 책을 리아 쪽으로 내민다. 대신 뜯어보겠냐는 듯.)
리아 P. 아이아나:(흥, 고개 홱 돌린다.) 동화책을 꽂아둘 장소는 있어요? 안 어울리는데. (책을 받아들고 포장을 뜯는다.) 저도 동화책은 되게 오랜만인데. 어릴 때나 읽었던 것 같아요.
이안 J. 휴고:아니, 책을 아주 안 읽지는 않거든요. 참나. (없으면 동네 초등학교에 기부할 요량으로.) 제가 리아 씨의 죽어있던 동심을 되살릴 기회를 드릴게요.
리아 P. 아이아나:평소에 동화책을 읽고 지내실 줄이야. (명백히 놀리는 투다. 팔랑이며 넘어가는 책장. 그저 천천히 읽어나간다, 종종 문장 두어 개를 읊으면서.) 이건 네가 알지 못하는 세 번째 소원을 위한 거란다⋯
드디어 세 번째 소원을 이루었구나. 사람에게 이보다 더 큰 행복은 없단다.
이안 J. 휴고:그냥 눈에 띄어서 산 거거든요. (한마디도 안 지려는 게 동화책 읽는 수준이 맞는 걸지도⋯) ⋯그래서 뭘 샀는데요? (분위기 못 읽고 묻는다.)
리아 P. 아이아나:(책을 덮어 이안에게 들려준다.) 안드레아스는 돈을 나눠줬대요. 가난한 마을사람들에게.
왜 그랬는지는 집에 가서 찬찬히 읽어봐요, 독후감 쓰는 것도 잊지 말고. (어린이 대하듯⋯)
이안 J. 휴고:앗. (제법 따스운 결말. 안에서부터 미미하게 따뜻해졌다. 소중하게 책 받아 들었다가 뒤늦게 대사 속의 뉘앙스를 알아차렸다.) 저기요.
리아 P. 아이아나:으응? (부러 모르는척 한다. 티를 팍팍 내는게, 아까의 복수라는 거다.)
이안 J. 휴고:(하⋯. 복수심으로 발을 밟으려고 해 봤자 민첩하게 피할 것 같다 금새 포기한다.) 다 본 것 같은데 위로 가죠. 기운 뺐더니 배고파졌어⋯.
이안 J. 휴고:(전에 갔던 곳이 김치찌갠가 부대찌개였던 것 같은데. 어쩐지 계속 빨간 음식을 먹게 되네.) 좋아해요?
리아 P. 아이아나:(부대찌개였지. 랍스타가 들어간⋯⋯) 1단계 정도는 괜찮아요. 갈까요?
이안 J. 휴고:(아⋯ 이번에는 뭘 넣어주려나.) 갑시다. (손 내밀었다가 거두고 먼저 간다)
리아 P. 아이아나:(주다 만 손 보고⋯) 아하. (티켓 달라는 게 아니었구나⋯ 하고 뒤따라가서 손 잡는다.) 눈치 없다는 건 이쪽이었군요? 난 또.
이안 J. 휴고:(잡힌 손에 시선 뒀다가 옆으로 비껴나간다.) 뭘 생각한 거야, 진짜. (볼멘소리 내는데 기분 나쁜 투는 아니다. 아마⋯.)
리아 P. 아이아나:이안 씨가 그렇게 제 손이 잡고 싶으셨다니 몰랐네요. (당연하게도 놀리는 말투.)
이안 J. 휴고:(이제 나빠지는데?) 리아 씨, 제발 좀. (한숨 뱉더니 손 잡고 질질 마라탕집으로 끌고 간다.)
리아 P. 아이아나:장난이에요, 하하. 저도 이런 건 익숙하지가 않아서. (질질 끌려가며⋯)
마라탕 가게는⋯
사람이 많다1 한산하다2 2
의외로 한산합니다.
이안 J. 휴고:좀 익숙해지세요. 참⋯ 연기자라는 분이. (가게 안 들어서며) ⋯식당에 손님이 없는 풍경에 불안해하는 게 좋을까요, 아니면 한적하니 편안해하는 게 좋을까요?
리아 P. 아이아나:그래도 이안 씨 앞에서 연기하면서 지내고 싶지는 않거든요. 익숙해져 볼 테니까 당신도 좀 봐줘요. (두리번⋯) 그래도 가게는 깨끗한데. 오늘은 일단 먹어보고 괜찮으면 다음에 또 와요.
이안 J. 휴고:⋯그 말은 믿어볼게요. (흘끔 내려다보더니 창가자리는 어떻냐며 손으로 가리킨다.) 나름 저랑 함께하는 시간이 괜찮게 흘러가고 있나 봐요. 선뜻 다음을 얘기하시는 것 보면.
리아 P. 아이아나:여전히 제 신뢰는 땅바닥에 있군요. (이안이 가리킨 자리에 겉옷 벗어놓고) 이상하다, 분명 어디 안 간다고 했을 텐데.
이안 J. 휴고:땅바닥은 아니죠. 같이 하늘도 날아본 사이에. (나직하게 웃는다. 농담인지. 그 반대편 자리에 겉옷 벗어두고 보니 기분이 살짝 묘해졌다. 정말 커플룩이었네.) 옆에 있어서 괜찮은 거랑 어디 안 가는 거랑은 어감이 좀 다르잖아요. 싫은데 제가 붙잡아두는 걸 수도 있고?
리아 P. 아이아나:그런가⋯ 둘이 무슨 차이인데요? 그리고, 음⋯ 싫었으면 이렇게 같이 있지도 않았어요. 저도 떠나고 싶었던 적 없기도 하고. 그래야 할 것 같았을 뿐이지.
이안 J. 휴고:땅바닥보다는 조금 위에 있어요. 제 키보다 낮은⋯ (시선이 상대 정수리에 머문다.) 그건 다행이네요. 싫어했어도 상관없었으려나. (말꼬리 흐리며 두리번거린다.) 그나저나 마라탕 가게는 처음인데. 앞에서 주문하는 건가?
리아 P. 아이아나:⋯어떻게 해야 올라갈지 감도 안 잡히네. (고개 젓는다.) 어차피 떠나도 찾아낼 거면서. (두리번거리는 이안 고개 재료들 쪽으로 돌려준다.) 저쪽에서 먹고 싶은 재료를 담고 카운터에 가져가면 무게에 따라 계산되는 시스템이에요.
이안 J. 휴고:일단 익숙해져 보세요. 믿음은 한순간 생기는 게 아니라 꾸준히 쌓이는 거라고 배웠거든. (이어진 말에 별다른 답 없이 웃는다. 부정은 못 하겠어서.) ? (영문 모를 틈에 고개 잡혀서 돌려진다⋯.) ⋯고⋯마워요? 각자 담아 오죠. 랍스터가 있었으면 좋겠네. (무게로 계산하는 거면⋯. 비싼 재료나 넣어야겠다 생각 중.)
리아 P. 아이아나:이렇게 꾸준히 만나기도 어려운데. 좀 후하게 쌓아보세요, 믿음이란 거. (잠시 뜸⋯) 만약에요, 정말 만약에 내가 떠난다면⋯ 나를 찾을 건가요? 계속? 그러니까⋯ 영원히? (랍스터 같은 건 없어요. 작게 핀잔주며 재료 담는다⋯)
랍스터, 있나?
행운 극단적 성공하면 넣어드리겠습니다
이안 J. 휴고:(아 고작 마라탕 먹는데 행운을 써도 되는 건가?)
운
기준치:
75/37/15
굴림:
57
판정결과:
보통 성공
(안될듯)
랍스터는 없는데⋯
이거 뭐지? 민물가재는 있다⋯
이안 J. 휴고:(??? 이게 더 희귀한 거 아닌지. 민물가재를 담는다⋯) 당신의 '만약에'가 믿음을 쌓는 데에 있어 가장 큰 걸림돌이에요, 리아 씨.
그러니까—. 나 스스로라도 믿어야지 어쩌겠어. 네, 저라면 분명 떠난 당신을 찾을 거라고 믿어요.영원히.
리아 P. 아이아나:(왜 자꾸 갑각류들이⋯) 뭐, 모를 일 아니겠어요? 살다 보면 자연스레 멀어질 수도 있는거고.
⋯그래도 날 찾아준다니 기쁘네요. 안 찾아주면 내심 서운할지도 몰라요. 아니, 아마 그렇겠죠⋯ 너무 뻔뻔한 소리려나?
이안 J. 휴고:모를 일이니까 지금은 함께하는 현실에 집중하려고요. (잠시 시선 맞추더니 몸 돌리고 재료를 마저 담는다.) 뻔뻔하긴 한데 전 익숙해져서 괜찮습니다. (어묵이랑 당면, 소고기, 야채 조금 얹고 계산대로 간다.)
리아 P. 아이아나:하하. 그래도 전 이안 씨가 먼저 사라질 일은 걱정 안 해도 돼서 좋네요. 상황 때문에 멀어져도 소식이 없으면 서운하더라고. (따라 재료 담고 계산대로.) 익숙해져서 다행이네요. 하하.
직원은 그릇의 무게를 달고 가겨을 안내합니다.
맵기 단계를 묻는 질문 후에는 그릇을 가져가 조리해오네요.
이안 J. 휴고:아시면 좀 자주 연락해요. 무작정 쳐들어오기 전에. (처음 먹는 거니까 안전하게 1단계를⋯.)
리아 P. 아이아나:알았어요. 그래도 자주 쳐들어간다고 생각했는데.(분명 이런 걸 원한게 아니겠지만⋯) 연락이라, 먼저 자주 할걸 그랬나⋯ (물 따라서 이안 앞에 밀어준다.)
이안 J. 휴고:아니 근데 리아 씨 친구 없어요? 왜 이렇게 제 집에 자주⋯ (뚫린 입이라고 이런 소릴!) 그리고 연락은 해주면 좋죠? 티비나 신문에서 괴도의 소식을 전해 듣는 것보다는⋯ (자연스레 받고 한 모금 마신다.)
리아 P. 아이아나:⋯다 크고 이사온 거라 아는 사람도 많이 없거든요?! (빽!) 영화사 쪽에선 완전 일로만 보고! 연극 쪽에서는 그래도 친하게 지내는 사람 정도는 있지만⋯ 아직 시작한 지 얼마 안됐으니까..(중얼중얼.) 그래도 이안 씨한테는 연락 많이 하는건데⋯(중얼중얼2)
이안 J. 휴고:⋯혹시 지금 위로를 건네드려야 하는 타이밍인가요? (사과가 먼저일지도⋯.) 그⋯. 어, 생길 거예요. 하하. 근데 저번에 보니까 제 직장 동료들이랑 잘 지내려고 하는 것 같던데? 다음에 식사 자리라도 한번 추진해 볼까요.
리아 P. 아이아나:위로같은 건 됐거든요. (흥.) ⋯뭐, 나름대로 사람들이랑 잘 지내고 있으니까 괜찮아요. 아, 음식 나왔다. 빨리 먹기나 하자고요. (어쩐지 불퉁한 말투⋯)
이안 J. 휴고:(그럼 위로 대신에,) 화이팅! 사람이 좀 친구가 없을 수도 있죠, 하하. 전 그래도 마음 편하게 얘기할 수 있는 사람 한 명이라도 있으면 나름 인생 성공한 거라고 생각하거든요. (수저 건네준다. 음식 모양새 보고 짧은 감탄사 내뱉는다.) 매울 것 같은데? 먼저 드셔보세요. (선뜻 제의하는 것 같은데 실상 기미상궁 자처해달라고 하고 있다⋯.)
리아 P. 아이아나:참나. ⋯전 그 마음 편하게 얘기할 수 있는 사람이 너무 유치해서 문제지만요. 누구라곤 이야기 안 하겠는데. (태연하게 수저 받는다.) 1단계인데도 그러려나. (냠⋯)
(맵다1 괜찮다22)
(맛있다. ⋯그래도 장난 좀 칠까?) 쓰읍⋯ 이거 되게 맵네요.
이안 J. 휴고:리아 씨 친구가 어린애 밖에 없어요? 저런⋯. 에이, 기분이다. 제가 한 달에 한번 대나무숲 역할은 해드릴게요. 나름 입은 무겁다고? (그 누구가 본인이라고 생각 못 하는 건지⋯.) 어어. 그 정도예요? (한입 먹는다⋯ 맵다1 괜찮다2 2)
괜찮은데? (념념)
어린애 입맛⋯ (물 더 따라준다.)
리아 P. 아이아나:당신은 참, 여전히 바보네요. (고개 젓는다⋯) 흐음⋯ 안 통하네. 그냥 당신 놀리려고 매운 척해봤어요. (으쓱. 멀쩡하게 잘 먹는다⋯) 바보인데 겁이 없어서 안 통할 줄이야.
이안 J. 휴고:이건 또 무슨 소리지. (시선 가늘어진 채⋯. 우물우물우물우물⋯.)
리아 P. 아이아나:못 알아들었으면 정말 바보란 건데. (냠냠⋯)
이안 J. 휴고:장난꾸러기랑 거짓말쟁이 둘 중에서 뭐가 더 좋아요? (별칭으로.)
리아 P. 아이아나:둘 다 마음에 안 드니까 이상한 별칭 붙일 생각 말아요. (척,)
이안 J. 휴고:난 마음에 안 드는데 바보가 됐는데? (어이없어. 물 벌컥.)
리아 P. 아이아나:그거야 뭐, 어쩔 수 없는 거고요. (뻔뻔하게 나온다.) 참, 그러고 보니 밖에 샌드위치도 팔고 도넛이나 크레페, 탕후루 가게도 있더라고요. 마시멜로와 딸기를 꽂은 산타 탕후루가 인기라던데.
이안 J. 휴고:파렴치한으로 하죠. (마라탕 계속 먹는다⋯ 그나저나 리아는 어떤 재료를 넣었을까.) 산타 탕후루? (눈썹 까닥인다. 흥미 돋는 모양⋯.) 그런데 다 먹고 배 안 부르겠어요?
리아 P. 아이아나:저기요. 허참, 저를 멋대로 파렴치한으로 만들다니. (젓가락질은 꾸준히 하는중⋯ 소고기나 납작 당면, 청경채, 옥수수면 같은 것들.) 사서 걸으면서 좀 천천히 먹어도 좋을 것 같은데.
이안 J. 휴고:자업자득. (제 그릇과 별반 차이 없구나. 처음 먹는 건데 나름 재료 선택을 잘한 것 같아 뿌듯해진다.) 좋죠, 소화시킬 겸. 구경도 할 겸. 이러니까 정말 데이트 같네요. (그제야 뒤늦게 식당 주위를 둘러본다. 뭐 단서가 될만한 건 없나.)
리아 P. 아이아나:자업자득이라니 무슨 소리를. (표정 티 나게 찌푸린다.) 그럼 데이트인 걸로 칠까요? 연쇄살인 용의자랑 총기난사 현장에서의 데이트보단 이쪽이 좋을 것 같은데.
식당 주위에는 리아가 말한 가게들이 있습니다.
탕후루 가게는 줄이 기네요.
이안 J. 휴고:하도 뻔뻔하셔서 아시는 줄 알았는데. 어감이 그러면 철면피라고 불러드릴까요. (사전적 의미는 거기서 거기니까, 능청스레 답하다 연쇄 살인이라는 말에 사례 들린다.) 쿨럭⋯. 그, 래요. 크리스마스니까, 네. 다 드셨으면 일어날까요? 저기 줄이 길어서 빨리 서는 게 낫겠어요.
리아 P. 아이아나:맨날 너무한 말만 해. (투덜거린다. 계속 뭐라 중얼거리는 것도 같고⋯) 뭐, 그때 당신은 날 연쇄살인 용의자로는 안보고 계셨었지만. (잠시 주위 둘러보고) 산타 탕후루 들고 다니는 사람도 은근 많네요. 정말 인기 많나 봐. 가요!
이안 J. 휴고:(어떻게 밥 먹으면서도 저렇게 쉴 새 없이 볼멘소리를 할까. 그게 본인 탓이라고 생각하지는 못한 듯—그런 감상 머릿속에 그리며 그릇을 마저 비우고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챙긴다.) 네, 아마 앞으로도 그렇게 볼 일은 없지 않을까. 갑시다.
리아 P. 아이아나:그래도 의심 정도는 하는 게 좋을걸요. (따라 겉옷 주섬주섬 입으면서) 내가 연쇄살인마가 되겠다는 소리는 아니지만 당신은 형사잖아요. 편향적인 태도는 수사의 방해물⋯ 아닌가?
이안 J. 휴고:딱히 편향적이라고는 생각 안 하는데요. (이 또한 본인만의 관점이지만,) 나름의 단서와 논리로 추론한 결론이에요. 단서는 당신과 이제껏 함께 했던 시간들이겠고. 저도 처음에는 의심했어요? (다시 손 뻗는다.)
리아 P. 아이아나:그 주관이 문제라는건데도. '그럴 사람이 아니다'가 법정에서 통하는건 아니니까. (조용히 옷매무새 다듬다가 문득 말한다.) 그래도 믿어주는게 싫지는 않아요. 저는 그런 짓을 저지르지 않을거니까. 날 믿어주면 그 믿음에 보답할게요. (이젠 익숙하게 내민 손 위에 제 손을 포갠다.)
이안 J. 휴고:언제는 법과 같은 틀에 가두어진 사람이었나요, 당신이? (애초에 제가 믿는 건 그 행위보다도 당신의 윤리의식이자 가능성이니까,) 믿음의 기반은 이미 다져졌으니, 계속 쌓아가기만 하면 되겠네요. (가벼운 웃음소리가 이어진다. 맞잡은 손 끌고 밖으로 나섰다.)
리아 P. 아이아나:확실히 법의 틀에 갇혀있지는 않죠. 틀을 인식은 하고 있지만. (샤교도의 방식이 과격해서 다행이라고 해야할까? 원래라면 절도죄에 재물손괴는 기본일텐데. 배상 대신 내 목숨을 앗고싶다는게 다행인지를 고민해보다 금방 관둔다. 무슨 생각이 이래.) 쌓아보도록 해볼게요, 최대한.
탕후루 가게에는 대기중인 사람이 언뜻봐서⋯
15명.
이안 J. 휴고:(⋯많⋯은 건가? 아니, 다섯 정도는 가족으로 묶어버리고⋯ 나머지는 커플이라고 하면⋯ 없는 계산 머리 굴리다가 포기한다.) 인기 많나봐요. 식사 시간이라 그런가.
리아 P. 아이아나:그래도 이정도는 조금만 서있으면 금방 줄어들 것 같아요. (줄 한번 재어보다가) 주변에 들고 돌아다니는 사람이 많은 것도 인기에 한몫 하겠네요.
이안 J. 휴고:그러니까 이 많은 사람들 중에 대다수가 그 예고장 때문에 이곳까지 걸음 했다고요. 같은 괴도로서 어때요, 지금 원하는 대로 상황이 흘러가고 있는 것 같아요?
리아 P. 아이아나:그러게⋯ (작게 한숨쉰다.) 솔직히 말하면 잘 모르겠어요. 예고장을 보낸다는건 적어도 사람이 몰릴 각오는 하고 보내는건데 말이죠. 목적을 모르니 원⋯ 이렇게 사람이 몰려 있는데 사고만 안 나면 좋겠네요. 정말로.
이안 J. 휴고:정말 다치는 일만 없었으면 좋겠네요, 어후⋯. 저번 일 생각하면. (눈동자만 굴려 주위 살펴본다. 테러리스트나 심각한 자아도취에 빠진 사람은 없어 보인다, 당연하게도.) 그런데 왜 하필 크리스마스일까. 이 좋은 날에.
리아 P. 아이아나:⋯저번 일? (큰일날 뻔 한게 하루이틀인가⋯ 언제 말하는건지 감도 안 안다.) 오히려 크리스마스라서 아닐까요. 원래도 인파가 모이는 날이고, 마침 전시도 하겠다. 특별한 날일수록 좋은거겠죠.
이안 J. 휴고:그, 와플 먹었던 날이요. (저도 사실 좀 헷갈린다.) 나르시스트에 엉뚱한 곳에 집착하는 면모도 있네요. (진짜 어떤 사람일까, 이번 괴도는.) 오, 이제 사람 좀 줄은 것 같은데요? (기웃거린다.)
리아 P. 아이아나:아하. 확실히 무서웠죠, 그날은⋯ 모델건 난사였으니까. ⋯ ⋯이번엔 아니었으면 하네요. (어떤 사람일까. 하는 생각과 동시에 든 다른 생각.) 그 괴도를 마주치면 체포할건가요? (산타 몇개 남아있나 같이 기웃기웃.)
이안 J. 휴고:호루라기는 챙겨 왔는데, 이런 분위기에 인파에 얼마나 쓸모가 있을지는 모르겠네. (이어진 질문에 답을 내놓기까지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당연하죠, 일단 체포를 해야지 어떤 의중을 갖고 이 소란을 벌였는지 알아낼 수 있을 거 아니에요. 더한 범죄 계획이 있으면 막을 수 있을 테고. 죄의 무게를 재는 건 제가 아닌 판사겠지만. 제 역할은 그거잖아요. 왜요?
리아 P. 아이아나:그런걸 챙겨 다니시는구나. 저는 오늘은 거의 빈손이거든요. 괜찮으려나 모르겠네. (걱정하는 투다.) 그런가. 예고장만 보낸 것도 체포 가능한 범주려나? 단순히 장난치고 싶은 사람일 수도 있잖아요?
이안 J. 휴고:웬일로 빈손으로 오셨대. (리아가 걱정을? 좀 의아하게 본다.) 그게 인명피해로 이어질 수도 있으면 체포해야죠. ⋯아닌가? (줏대가 없다⋯) 그냥 이제껏 겪어왔던 일들을 떠올려 보니까 이런 건 장난으로 봐주고 싶지 않네요. 과민반응인 것 같아요?
리아 P. 아이아나:오늘은 정말 놀러온거라⋯ 그 정장도 가면도 업고 물건도⋯ 섬광탄 하나랑 스턴건 뿐이에요. (과연 이게 빈손이라고 할 수 있을지는⋯) 저야 늘 보내는 입장이니까. 전 장난으로 한 적은 없었지만요. 사람들을 다치게 한다면야. 근데 그렇게 되면 당신은 사람들을 보지 괴도를 잡으러 튀어갈 것 같지는 않은데. 아닌가요?
이안 J. 휴고:??? (아니 빈손 절대 아닌 것 같은데) 리아 씨의 본질은 그 가면에 있던 거지⋯. 아, (정곡을 찔렸다.) ⋯그렇네요⋯. 그걸 의도하고 사람들을 모은 건가?! 본인 빠져나갈 구석을 만들려고. (턱 매만진다.)
리아 P. 아이아나:아니, 뭐⋯ ⋯평소에 들고 다니던 것들 생각하면 빈손이죠. 저 지금 평소에 비해 되게 가볍다구요? (금방 도끼눈 뜬다.) 제 본질이 왜 거기에 있어요? 나참. 그거 오페라의 유령에서 따온 가면이에요. 얼굴 가릴 마땅한게 생각이 안났어서. (어깨 으쓱.) 아, 저희 차례다. 당신도 산타 탕후루인거죠? (쇼윈도 안쪽 가지런히 누워있는 산타들 가리킨다.)
이안 J. 휴고:평소에는 뭘 들고 다니길래⋯. 아예 방탄복도 입고 다니죠? (농조인데 진심이 조금 섞였다. 도끼눈 빤⋯.) 거진 몇 년만에 알아차린 사실이네요, 그건. 연극할 때 쓰는 가면이라고는 생각했는데, (그런 쪽으로의 지식은 전무하니까. 쇼윈도 너머를 본다.) 와, 아이디어 좋다. 네, 하나만.
리아 P. 아이아나:방탄복도 고려했는데, 그럼 옷태가 굉장이 우스울 것 같아서⋯ (조금 진지하다.) 그 반가면은 뮤지컬 전용이에요. 원래는 눈을 양쪽 다 가리는 가면인데, 뮤지컬 쪽에서 그렇게 쓴다고 들었어요. 잡히게 되면 그쪽에서도 고소하려나. (말하는게 어째 가볍다.) 이걸로 두 개 살게요. (탕후루 받아서 하나는 이안에게 건내준다.) 하나 사줄게요.
이안 J. 휴고:이게 그건가요, 폼생폼사? (반면에 여기는 황당하다는 표정이다. 폭발에 난사까지 몇 번이고 휘말렸는데 저렇게 태연하다고. 심지어 그 총탄 중 하나는 지금 눈앞에 있는 본인이 쏜 거다.) 뭔 그런 거 가지고 고소를 하겠어요, 쩨쩨하게. 오히려 팬텀이 뜨고 난 이후로 일명 팬텀 굿즈들을 사들이는 팬층이 생겼으니 홍보 효과가 되지 않았으려나. 아, 그래. 잘해봐요, 당신 팬클럽 같은 거 생기지 않았어요? (이쪽도 가벼운 투다. 고소도 잡히고 난 이후의 일이지. 탕후루 건네받으면 눈 살짝 커진다.) 고마워요? 받아먹을 줄은 몰랐네. 크리스마스 선물인가요, 이거?
리아 P. 아이아나:그런 것까진 아니지만, 완전무장 상태가 아니라 잔뜩 꾸미고 사람들이 보기에 재미있는 연출을 하는데에는 이유가 있죠. 그 편이 더 사람들의 이목을 끌기 좋으니까. 무대 위에선 완벽해야죠. (그러지 않으면 금방 묻힐 일들이었다. 이미 위험을 감수한 김에 제대로 하겠다는 거다.) 그런가? 팬클럽은 잘 모르겠지만, 굿즈라고 하니 생각나는건 있는데. 이 귀걸이, 모조품이 많이 돌아다니더라고요. 그래서 이렇게 끼고 다녀도 사람들이 가짜겠거니, 하고 마는거고요. (산타 모자 한입 베어문다.) 으음. 아뇨. 그냥 기분으로. ⋯(뭔가 말하려다 말았다.)
이안 J. 휴고:당신한텐 현장이 무대예요? 사건은 재밌는 연출이고? 이게 어디 막이 내리고 배우가 퇴장하면 끝나는 이야긴가요? (시선이 가늘어진다.) 아- 그래서 동료들이 이걸 보고도 별말을 안 하는 건가. (언뜻 제 오른쪽 귀에 제대로 걸린 귀걸이를 만지작거리며 모자를 와작 씹어먹는다. 블루베리랑 딸기인가? 입안 가득 단맛이 퍼지는 게, 아까 먹은 식사의 디저트로 제법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삼키고 난 후에 물었다.) 무슨 말 하려고 했어요?
리아 P. 아이아나:무대에 서는 기분으로 가고 있어요. 그렇지 않으면 부담감이 너무 커져서. 사교도가 하는 일 막기도 바쁜데, 경찰도 쫓아오고. 사람들 시선 피하기도 어렵고. 추락하면 어떡하지, 막지 못하면 어떡하지. 사람들이 다치면, 일을 막기 전에 잡혀버리면 어떡하지⋯ 하지만 이런 걱정거리를 보여줄 수는 없으니까, 크게 심호흡 하고 무대에 서듯 하는거죠. 물론 여기는 현실이라 무대에서 내려오면 귀가길 발걸음이 무겁지만. (당신의 시선을 모르는 척 웃는다.) 세상에선 괴도의 반대쪽 귀걸이가 어디갔나에도 관심이 많더라고요. 왜, 처음엔 양쪽 다 끼고 나왔었잖아요. (물음에 당신의 귀걸이를 잠시 보다 만다. ) 이거 줄게요. 진짜 크리스마스 선물. 대단한건 아니지만.
그렇게 말하며 리아가 다소 어색하게 포장된 선물을 건넵니다.
반투명한 상아색 포장지에 반짝이는 펄 리본으로 묶여있습니다.
이안 J. 휴고:트루먼 쇼도 아니고 그게 뭐예요. 그러다가 죽으면 그것도 각본의 일부라고 여기겠어요. (그게 마음에 안 드는 모양이다, 이 현실에 지극히 충실하고자 하는 인간은⋯. 시선이 바닥으로 향했다가 내밀어진 포장지에 머문다. 두 번째로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이건 또 뭐예요? (되물었으나 의심은 없다. 건네받은 선물을 귓가에 대고 위 아래로 작게 흔들었다. 이게 뭐지?)
리아 P. 아이아나:죽을 때에는 그렇게 위로할 수 있으려나. 그래도 걱정하지 마세요, 저는 배우니까. 무대 위에서는 피흘리고 쓰러져도 극이 끝나면 웃는얼굴로 커튼콜을 하고 집으로 돌아갈테니까. 또 뭐가 머음에 안드실까. (이건 제가 연기에 충실하는 방법이었다. 당신이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을 알면서도 장난스레 물어왔다.) 궁금하면 풀어봐요. 정말 별건 아니긴 한데⋯
이안 J. 휴고:진짜 죽음은 그런 걸 뜻하는 게 아니잖아요, 배우 리아 씨. (부러 두 음절 강조해서 발음한다.) 유령이 돼서 커튼콜을 하면 관객들 중 누가 알아봐 준대요? 돌아갈 곳이 관짝이 아닌 집이라 확신해요? (툴툴거리면서 리본을 풀어 포장지를 뜯는다.)
리아 P. 아이아나:알아요, 그래도 그런 의미로 이야기한게 아닌건 알잖아요. 너무 화내지 마요. (양손 가볍게 들어서 취하는 항복 제스쳐다.) 나보다 내 목숨 걱정이 더 많은 것 같네, 정말.
포장지 속에 있는건 청록색 돌이 달려있는 팔찌네요.
리아 P. 아이아나:그거, 터키석이래요. 어딘가에선 부적으로도 쓰인다고 하더라고요.
남자한테 장신구 두 개는 역시 과한가 싶지만서도. ⋯역시 돌려줄래요?
이안 J. 휴고:(아주 만족스럽지는 않았으나 더 추궁하지는 못했다. 다만 시선 거두지는 않았다.) 누구가 걱정을 해도 너무 안 하는 것 같아서 좀 대신 해줬네요. (아, 그 누구 눈색이 생각난다는 감상도 잠시.) 네?! 줬다 뺐는 게 어디 있어요? (팔찌를 제 손목에 차고 이리저리 둘러본다.)
리아 P. 아이아나:저만큼 걱정 많이 하고 사는 사람도 드물텐데. (일부러 모호하게 빠져나간다.) ⋯.. (팔찌 둘러보는 모습 바라보다 옆쪽 전시장 가리키고 화제를 아예 돌려버렸다.) 저쪽에 전시장이 있거든요. 큼⋯ 가요.
이안 J. 휴고:연기력이 워낙 출중하셔서 일개 관중 속 한 명은 미처 못 알아봤네요. (비난보다는 농담에 가깝다. 더 말꼬리를 붙잡지도 않았다. 선물 하나 받았다고 기분이 들뜬 건지 뭔지. 그야, 이건 소품이 아니라, 제 4의 벽을 뚫고 나온 선물이니까. 당신의 크리스마스 선물은 조금 더 고민해봐야겠다.) 네네, 가봅시다. 저기도 뭐가 많을 것 같네요.
누구에게도 털어둘 수 없는 불행한 사연을 껴안은 두 사람은 첫 만남부터 마음이 맞지 않아 날을 세우기 바쁘지만,
드라마틱한 사건사고나 운명같은 기적이 겹쳐지며 자연스레 연인이 됩니다.
화려한 일루미네이션이 빛을 발하는 가운데 ‘릴’ 이 ‘세이’ 에게 말합니다.
“너는 내 빛이야. 난 널 영원히 사랑할거야.”
그러나 시간은 흐르고 기적은 빛바래갑니다.
두 사람은 점차 ‘영원히 사랑한다는 것’ 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깨닫게 됩니다.
생활 환경이 바뀌고, 취향과 시야가 달라지며 두 사람은 점차 충돌하기 시작합니다.
이윽고 골은 메울 수 없이 깊어져 결국 그들은 이별을 택합니다.
마지막, 세이는 홀로 빛이 꺼진 일루미네이션 아래를 걸으며 독백합니다.
‘사람들은 소중한 것이 생겼을 때 그것을 기적이라 부르고 싶어한다. 이것이 신의 뜻이라고. 하지만 장담하건데 신에게는 아무런 뜻도 없다. 우리는 그저 우연히 만난다. 하지만.’
일루미네이션에 빛이 켜집니다.
세이가 눈물을 터뜨립니다.
‘빛은 있다. 바로 지금 여기에도.’
리아 P. 아이아나:영화, 어땠어요?
이안 J. 휴고:(깜빡.) 나쁘지 않네요. 조금 난해했나? 당신은요?
리아 P. 아이아나:만듦새는 좋은데, 저는 꽉닫힌 해피엔딩이 좋아서.
이안 J. 휴고:음. (동의의 의미로 주억거린다.) 그런데 유독 신에 관련된 소재가 많네요. 착각인가.
리아 P. 아이아나:영화는 꽤 큰 기획사에서 만들어서 잘 모르겠는데. 전시장은 좀 수상하긴 했어요.
이안 J. 휴고:그런가. 생각해보니 크리스마스 자체가 성자의 탄신일을 축하하는 날이네요. (자리 정리하고 영화관 밖으로 나선다. 다음에는 플라네타리움을 가볼까, 중얼거리고) 영원한 사랑 같은 거 믿어요?
리아 P. 아이아나:영원한 사랑이라. 영원하고 싶은 마음이라면 알 것 같짐만요. 사실 잘 모르겠네요. 영원할 것 같았던 가족도 이젠 연락 안하고 지내는걸. 온전한 타인을 그렇게 사랑할 수 있을까요⋯
이안 J. 휴고:또 우울해졌어. (검지 쭉 뻗어서 당신 이미 꾹 누르더니 플라네타리움으로 발걸음 옮긴다.) 그러고보니 가족이 있다는 말은 못 들었네요.
리아 P. 아이아나:우울한 이야기는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꾹 눌리면 깜빡깜빡⋯) 으음. 저도 소식을 몰라서 그닥 언급할 일이 없었죠. 오빠가 하나 있어요. 저랑 완전히 똑같이 생겨서 길가다 마주치게 되면 어! 하실걸요? 키는 좀 크지만.
이안 J. 휴고:원래 본인들은 잘 모르더라구요. (리아가 둘⋯? 머릿속에 이미지를 그려본 건지, 미미하게 눈살이 가늘어졌다.) 왜, 먼저 연락해보지 그랬어요.
리아 P. 아이아나:나이차가 꽤 나서, 오빠는 진작 독립했었거든요. 바쁘게 살다보니 원래도 연락이 잘 안됐는데, 둘 다 이젠 번호가 바뀌어서.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저도 얼마 안있어서 독립하고 이사했으니까. (가벼운 투다.) 플라네타리움도 갈건가요? (입구 안쪽 몸 기울여서 구경해본다.)
이안 J. 휴고:원하시면 전화번호 정도야 찾아 드릴 수 있는데. (잠시 입 다물었다. 타인의 가정사에 함부로 말 얹지 않기로 하고 가볍게 대사 이어간다.) 볼 수 있으면 다 보는 게 좋죠. (상체 기울이고 구경한다.)
리아 P. 아이아나:어떻게요? 설마 공권력을 낭비해서? (이안 빤히⋯) ⋯괜찮아요. 어딘가에서 잘 지내고 있겠지 싶어요. 무소식이 희소식이란 말도 있고.
이안 J. 휴고:낭비라뇨? (허?) 실종신고로 접수 되면 '조사'를 못할 것도 없죠? (뒷목 긁적인다.) 진짜 모르겠네, 우리 누나들은 가족 단체 메세지방을 거의 개인 SNS로 쓰던데.
리아 P. 아이아나:아니, 평범하게 독립하고 살다 연락이 끊긴거니 실종신고 접수 자체가 반려될걸요. 그걸 접수로 만드는건⋯ 공권력 남용이 맞고요, 형사양반! (이안의 가족 이야기에 잠시 상상해보다가⋯) 가족분들은 이안씨랑 닮았나요?
단순히 별 하늘을 보여주는것 만이 아닌, 별자리에 관련된 신화나 별과 관련된 사연 등을 엮어 라디오처럼 밤하늘과 함께 즐길 수 있도록 만든 프로그램이 인기인 것 같습니다.
오늘 상영중인 프로그램은 <겨울의 밤하늘 ~폴라리스를 찾아서~> 라는 제목이네요.
플라네타리움에 들어간다면 입장료를 지불하고 티켓을 따로 구매해야합니다.
12000원에 구매할 수 있는 일반 좌석과 30000원에 구매할 수 있는 잔디 좌석이 있습니다.
일반 좌석은 영화관과 비슷한 평범한 의자, 잔디 좌석은 인조 잔디를 깔아둔 단상 위에 준비된 푹신한 매트와 베개를 2명이서 사용할 수 있는 자리입니다.
소위 말하는 커플석이네요.
이안 J. 휴고:뭐 찾고 싶다고 하면 찾는 거죠? 그리고 왜 굳이 공권력을 남용해야하지, 그냥 늘 하던 것처럼 파트너로 같이 사건을 해결하면 되는 거잖아요? (이어지는 질문에 눈동자 굴린다.) 닮⋯았나? 그렇다고 하면 누나들이 화낼 것 같은데⋯. 가운데 누나랑은 좀 닮았고, 나머지는 그닥. (평이하게 이어가며 안내문을 본다.) ⋯무슨 좌석이 30000원? 일반석이랑 2.5배나 차이가 나는데? 뭐 할래요?
리아 P. 아이아나:아, 이것도 사건으로 쳐주는건가요? 그렇게 무거울줄이야. ⋯그래도 고마워요. 알아내면 좋겠네요, 얼굴 안본지 오래됐고. 보고싶기도 하고. (웃는 얼굴이다. 그리움을 떠올려도 외롭진 않았다.) 아하. 뭐랄까 상상은 잘 안되네요. 이안 씨가 막내란건 납득이 쉽긴 한데.(자기 이야기이기도 하면서⋯) 30000원⋯ 비싸긴 하네요. (진짜 그렇게 한다고? 하고 다시 봄⋯) 아, 그래도 2인석인가봐요. 15000원이라고 하면 2.5배까진 아니겠네요.
이안 J. 휴고:(위로 솟은 입꼬리 끝을 물끄러미 쳐다본다. 우울한 얼굴은 아니라서 다행이라는 생각을 잠깐.) 이번 일만 무사히 끝내면 추진해보도록 하죠, 당신의 오빠를 찾는 일. 궁금하시면 저희 누나들 만나볼.. 아니, 예전에 한번 본 적 있지 않나? 무단 침입했을 때⋯. (떠올리곤 낯색 살짝 어두워졌다. 아찔했지⋯.) 아, 2인석이면 괜찮은데? 푹신한 매트랑 베개까지 쓰는 거면. 이걸로 할까요?
리아 P. 아이아나:비록 제공 가능한 단서는 몇 없지만. 그래도 방향이 있다는건 좋네요. ⋯무단 침입이라니. 나참. 그리고 그때 놀라고 당황해서 저 갈까요? 만 반복하다가 시선 피한다고 바빠서 되게 흐릿하게나 기억나거든요⋯ 머리속에 온통 '어떡하지' 뿐이었다고요.(그날 멀쩡한 얼굴로 인사도 나눴으면서 하는 말이 이렇다. 겉껍질은 근사해도 속알맹이는 이렇다는 거다.) 오래 서있었으니까, 그럴까요? 전 좋아요.
이안 J. 휴고:있는 단서가 뭔데요? 당신과 닮았다는 것 말고도. 그리고 당신이 놀라고 당황했다면 저는 어땠겠어요? 그리고 멀쩡한 얼굴로 인사도 나눴으면서. 하도 당당하시길래 서로 아는 사이인 줄 알았잖아요. (그리고 이 눈치 없는 인간은 정말 당신이 멀쩡한 건 줄 알고 있는 건지. 그렇게 믿고 싶은 건지⋯. 줄이 줄어들고 매표소에 당도하면 잔디 좌석으로 구매한다.) 인조 잔디면 진짜 풀밭에 눕는 기분 나겠다. 캠핑은 잠입수사 할 때나 몇 번 해봤는데 말이에요.
리아 P. 아이아나:처음 독립했을 때 간다고 했던 지역이 제가 지금 사는 지역이란게 하나, 그때 말했던 직업이 바텐더란거. 키는⋯ 170 후반정도 됐었나⋯ 눈색도 머리색도 저랑 똑같고요. ⋯이정도? (새삼 아는게 없구나, 하고 중얼거린다.) 아니, 거기서 눈치보면⋯ 이상해보이잖아요! 안그래도 물건도 이거저거 놔뒀는데! (한껏 뭐라하고⋯) 수사 중이었으면 캠핑하는 느낌도 안났겠네요. 지금이라도 즐겨보시는건?
이안 J. 휴고:어어, 혹시 오빠 따라서 이 지역으로 이사하신 거예요? 아닌 척하시면서 진짜 보고 싶었구나. 직업을 알면 더 쉽죠, 동네 술집 탐방을 가면 되니까⋯.. 그런데 당신은 배우고, 오빠분 께서는 바텐더고. 진짜 닮은 점은 외형 밖에 없는 거예요? (쿨럭⋯.) 아, 아니 그렇게 말씀하시니까 갑자기 확 와닿네. 리아 씨 안 계실 때는 당신 물건들 다 치워놔야겠어요⋯. (그때 받았던 시선이고 취조같던 질문들이 하나씩 되새기는 듯, 혀 내두르더니 표 건네고 입장한다. 잠시 뜸 들이고,) 고백 하나 할까요. 실은 아까부터 즐기고 있는 중이었어요.
리아 P. 아이아나:뭐, 괜히 핑계 대면서 이사한건 맞아요. 어떤 동네에서 어떻게 살았나 궁금했기도 하고. 그치만 여기에 계속 살고 있다는 보장은 없으니까요. 오빠랑 나이차가 9살인데 독립은 성인이 되자마자 했거든. 한번씩 얼굴은 봤어도 사는 곳 이야기는 딱히 안했어서. 진작 이 동네 뜨고 남았을지도 모르죠. ⋯글쎄요. 닮은 점이라⋯ 꾸미는거 좋아했던건 비슷했던 것 같은데. (그 외에는 잘 모르겠다는 듯 어깨만 으쓱하고 만다.) 너무 생각 없었던거 아녜요? 곤란하네, 정말. (입장하며 입구 옆에 있는 소등 시간 확인해본다. 정각? 지금 시간은⋯소등 9분전.) 사실 그래보이긴 했어요. 저도 들뜨는건 어쩔 수 없기도 하고요.
이안 J. 휴고:어우, 9살이면 안 친할 만하다. 오빠가 거의 리아 씨를 업어키운 거 아니에요? 그건 나중에 술집 돌아다니면서 수소문 하다보면 알 수 있겠죠, 뭐. 그런데 당신은 그렇게 아는 사람 한 명 없는 곳에서 새 삶을 시작하면 외롭지 않나봐요? 아니면 신나려나. 새로운 학교에서 새학기를 맞이하는 것처럼. (질문하는 목소리가 가볍다. 본인은 이제껏 후자에 가까웠기 때문에 그럴지도 모르겠다. 곤란하다는 말에 계획에 없던 일이라며 대충 얼버무리고 발걸음 옮긴다. 좌석에 도착하면 짧은 감탄사 뱉더니 매트 손바닥으로 두어번 쳐본다. 폭신한 게 제법 마음에 든다. 베개 하나 리아한테 건네주고 씨익 웃는다.) 내심 그러기를 바라고 있었는데, 잘 됐네요! 이브잖아요, 한 해를 웃으면서 마무리하면 좋죠.
리아 P. 아이아나:그쵸? 그래도 어릴적에는 앚혀놓고 책도 읽어주고 그랬는데. 살다보니 이렇게 됐네요. 오빠를 만나게 되면 제일 만들기 귀찮다는 칵테일이라도 주문할까⋯ 참, 생각난게 하나 있는데, 오빠도 장난치는거 되게 좋아해요. 제가 오빠를 보고 배웠거든. (하하.) 새 삶이라⋯ 걱정도 많고 외롭기도 했지만⋯ 영화 촬영에 아르바이트에 바쁘게 산다고 생각할 시간이 별로 없는 쪽이었을까요. 지금은 그래도 천천히 자리를 잡아가고 있지만. (베개 건내받고 겉옷을 벗어 무릎에 덮었다. 마음에 쏙 든건지, 웃는 얼굴에 따라 웃으면서 옆으로 풀썩 누워버린다.) 그러네요. 같이 다니길 잘한 것 같기도 하고요.
이안 J. 휴고:불이라도 붙는 칵테일을 주문하게요? 이번에는 잔 바닥에 랍스터가 아니라 용가리가 나오는 건 아닐까 몰라⋯ ⋯그걸 보고 배웠다고. 갑자기 오빠 분 만나는 게 두려워졌는데요. 두 사람 페이스에 휘말릴 것 같아. (흐린눈) 그래도 좋은 오빠처럼 들리는데요, 앉혀두고 책 읽어주는 형제라니. 그건 대체 어느 나라 동화지. (⋯) 그럼 지금은 걱정도 외로움도 덜하다는 걸로 해석하면 되나요? (누운 모습 흘끗 보다가 바닥에 곧게 몸 뻗고 하늘을 쳐다본다.) 오, 곧 시작하나 보다.
리아 P. 아이아나:아뇨, 바텐더가 10분간 쉬지 않고 쉐이킹 해야하는거 시키려고요.(완전히 본격적⋯) 하하. 그래도 심한 장난은 안⋯ 치지만! 페이스에 말린다는건 뭐랄까⋯ 정말 그럴 것 같네요. 이안 씨, 정신 없는거 아닐까 몰라. ⋯좋은 오빠는 맞았어요. 절 많이 예뻐하고 챙겨줬으니까. 그래서 보고싶은건가⋯ (깜빡.) 네! 이젠 괜찮아요. 요즘은 즐겁게 살고 있는걸요. 일도 잘 하고 있고, 다른 일도 꽤 든든한 조력자가 생겼으니까. (옆으로 누워있다가 바로 눕는다.) 어떠려나.
자리를 잡고 누우면 실내가 어두워지고, 동그란 돔 형의 천장에 밤하늘이 수놓아집니다.
최근 유행하던 노래와 함께 성우가 사연을 읊습니다.
“5년쯤 전에 있던 일이에요. 저는 소꿉친구와 싸우고 무작정 거리를 걷고 있었죠.”
“많은 일에 지쳐있었어요. 방금 그 싸움조차도 단순한 제 화풀이었고요. 친구의 걱정을 걱정으로 받아들일 수가 없었어요. 정말이지 제가 더더욱 싫어져서 견딜 수가 없었죠.”
이안 J. 휴고:(직원한테 다가간다. 혹시 그 예고장이랑 연관이 있을까,) 실례가 안 된다면 이 쇼 왜 진행하지 않는지 알 수 있을까요? 기대를 많이 하고 왔거든요.
직원: 아, 죄송합니다. 오늘은 크리스마스 빌리지의 방문객들이 특히 많아 내부의 원활한 통제 및 더 많은 인원 수용을 위해 일루미네이션 상영을 중단하기로 했어요.
이안 J. 휴고:아쉽네요.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아, 혹시 이 코트랑 똑같은 색의 코트을 입은 밝은 금발의 여성분을 본 적은 없으신가요? 저기 이 아이랑 비슷한 또래의 아이들 무리들도요.
직원: (이안 코트랑 아이비 번갈아서 보고, 고민하나 싶더니⋯) 오늘 인파가 많아서 잘 모르겠네요⋯.
이안 J. 휴고:알겠습니다, 수고하세요. (고개 꾸벅이고 간다.) 어떡하지, 다른 곳으로 가봐야하나⋯. 넌 감이 와? 어디로 갔을 지. (아이비한테 물어본다.)
그나저나 2전망대를 둘러보며 기다려봐도 리아의 모습은 보이지 않습니다.
핸드폰으로 연락을 넣어봐도 묵묵부답.
어디로 간 걸까? 별 일은 없어야 할텐데요.
밤은 점점 깊어지고, 인파는 계속 늘어나고 있습니다.
그들은 모두 거대한 트리를 둘러싸고 괴도의 등장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대로 아무 일 안 일어났다간 오히려 큰일 나는 거 아닐까 싶어지면서도⋯
기묘한 기분이 듭니다.
그때,
아이비가 천천히 걸어 트리에서 살짝 멀어집니다.
그리고 이안을 바라보며 말합니다.
아이비:영원하다는 건 그 자리에서 고정된다는거야.
더는 흐르지 않고 변화하지 않아.
인류는 오랜 옛날부터 쭉 영원한 삶이라던가 영원한 사랑 같은걸 그려온 모양이지만
당신은 어때? 만약 손에 넣을 수 있다면 가지고 싶어?
이안 J. 휴고:(눈살 가늘어진다. 왠지 불길한데⋯.) 죽음은 피하고 싶지만 영원한 삶은 별로야. 손에 쥐어줘도 돌려줄 것 같네. 그리고 영원하다고 느끼는 건 내 마음 아닌가. 현실에 살고자 하면 그 짧은 찰나가 영원하게 느껴질 수 있지도 않겠어? (퍼뜩 정신을 차린다. 내가 어린애를 두고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그런데, 마냥 어린애라고 치부하기에는 묘한 기분이⋯.)
이안이 무엇이라고 대답하든, 아이비는 고개를 가만히 기울입니다.
아이비:그렇구나.
그리고.
아이비:슬슬 시간이네. 이제 시작될거야.
아이비가 천천히 손가락을 들어올립니다.
그리고 큰 소리.
“저기 봐! 누군가 있어!”
팟, 2전망대의 모든 조명이 소등됩니다.
동시에 하이라이트 조명이 트리와 메리의 집을 비춥니다.
트리의 허리까지 닿을 듯한 벽돌집의 긴 굴뚝 위에⋯
인영이 보입니다.
그는 후드가 달린 검은 망토로 온 몸을 감싸고 있습니다.
“어? 뭐야?”
“이거 상황극이야?”
관람객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수수께끼의 인물은 아랑곳하지 않고 천천히 양 손을 들어올려 가볍게 박수를 칩니다.
이안 J. 휴고:(일순 아이가 말했던 게 떠올랐다, 하필. 영원하다는 건 그 자리에서 고정된다는 거야.)
(주변을 둘러본다.) 당황하지 말고,
어떻게 된 거지? 지역 전체에 정전이 난 걸까요?
저 방향에는 분명 대형 병원도 있었던 것 같은데⋯ 괜찮은 거겠지?
막연한 불안감이 엄습합니다.
중요한 시설들에는 비상 발전 장치 등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것 같긴 하지만⋯
이 송전탑도 마비된 채 아직 복구가 안 되고 있으니까요.
이안 J. 휴고:(사람들도 멈추지는 않겠지. 계단으로 내려갈 수 있나 본다.)
창가에서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납니다.
주변은 온통 어둑어둑 합니다.
바닥을 희미하게 밝히는 양초도 하나하나 끝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 때.
“이안.”
바로 곁에서 속삭이는 낯익은 목소리.
누군가가 있습니다.
익숙한 기척입니다.
이안 J. 휴고:리아? (목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호명한다.)
“이 쪽으로 와요. 여긴 곧 더 소란스러워 질테니까.”
그는 그렇게 말하며 이안을 구석으로 데리고 갑니다.
이안 J. 휴고:당신이 그걸 어떻게 알아요? (졸졸)
어두워 얼굴까지는 보이지 않지만, 이 기척과 목소리는 분명 리아입니다.
그런데⋯ 뭘까?
묘한 위화감.
근처를 지키는 직원도 경찰도 없는 2전망대의 후미진 구석.
리아가 철컥거리며 무언가를 만지더니 문을 열고 밖으로 빠져나갑니다.
차가운 겨울바람이 뺨을 스치고 들어옵니다.
문 너머를 살펴보면, 위와 아래로 향하는 전망대 외부의 철골 계단이 보입니다.
리아는 위 쪽 계단을 올라가고 있습니다.
“도와줬으면 하는 일이 있어요. 위에 관제실이 있으니까 같이 와 주세요.”
라며, 리아는 어느정도 거리를 유리한 채 계속 계단을 걸어올라갑니다.
2전망대가 점점 멀어집니다.
얼마나 올라가야 하는거지?
그런 생각이 들면 리아가 돌연 작게 말합니다.
“오랜만이네요.”
뭐가?
되물을 새도 없이 곧 저 앞으로 철문이 하나 나타납니다.
리아가 그것을 열고 안으로 먼저 들어갑니다.
뒤를 쫓아가면⋯
낯선 모니터나 기계 장치들이 가득한 방입니다.
반딧불마냥 떠다니는 작은 빛의 구체가 내부를 희미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안 쪽, 전력이 나간 작은 엘리베이터 옆에는 [Staff Only] 라는 팻말이 붙어있네요.
두 사람이 관제실 안으로 들어오면 어둠 속에서 아이가 모습을 드러냅니다.
이안 J. 휴고:어?
아이비입니다.
아이비:기다렸어. 갑작스럽지만 나를 좀 도와줬으면 해.”
이안 J. 휴고:이거, 네가 한 일 아니야? (가늘어진 시선으로 본다.)
아이비:따지자면⋯ 당신들이 한 일이지. (이안과 리아를 번갈아 봅니다.)
이안 J. 휴고:우리가? (여기랑 리아랑 아이비 번갈아 본다. 정말 영문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아이비:이 사람은⋯ 당신처럼 나를 도와줬으면 해서 불렀어. 이 세계에서 부른 건 아니지만.
리아가 당신에게 한 발자국 다가옵니다.
얼굴을 가려두고 있던 옷깃을 치우고 마주봅니다.
그 순간 빛의 구체가 두 사람 근처를 지나가고⋯
리아의 얼굴이 드러납니다.
그 순간, 앞서 느꼈던 위화감의 정체를 깨닫습니다.
눈 앞에 있는 사람은 리아지만, 당신이 아는 것보다 조금 더 성장한, 혹은 나이든 모습입니다.
리아 P. 아이아나:오랜만이라고 했잖아요.
이성 판정. (0/1D2)
이안 J. 휴고:
SAN Roll
기준치:
70/35/14
굴림:
84
판정결과:
실패
2
⋯어?
리아 P. 아이아나:⋯제대로 설명해주는게 좋을 것 같네요. 저 아무것도 이해 못한 얼굴을 보아하니.
아이비:⋯
멜 록스의 저울을 깨뜨리고 싶어. 너희도 봤지?
그건 올린 물건의 가치를 가늠해서 자기가 인정한 물건과 그 주인에게 영원을 가져다 주는 물건이야.
영원하게⋯ 그러니까, 모든 시간과 차원에서 대상을 지금 그대로 고정시키는거지.
아주 오래 전에 나도 그걸 사용한 적이 있어.
그런데 이제는⋯
아이비는 잠깐 말이 느려지더니,
아이비:충분할까 싶어서.
하고 덧붙입니다.
아이비:당신에게도 가치는 있을거야.
그냥 두면 이 땅도 얼어붙을테니까. 그 저울로 세상을 영원하게 만들려는 사람들이 있거든.
지금 일어나고 있는 것도 그 계획의 일환이야.
이 탑에는 이 아이들이 살거든. 시간과 차원을 넘나들며 경계선을 지키는 아이들이야.
원래는 그다지 특이할 거 없는 장소였는데, 이 아이들이 오래 머물면서 성질이 좀 바뀌었어. 이 장소에는 수 많은 시간대와 다른 차원, 어떤 순간들이 교차하고 있지.
어떤 초월적인 일을 저지르기엔 좋은 장소라는 거야.
아이비:지금부터 3주쯤 전이었나, 그 사람들이 그 다이아몬드로 여기에서 그 저울을 썼어.
세계를 이 상태로 영원하게 만들고 싶어하는 사람들이야. 뭐, 이대로 있으면 지구가 멸망할 것 같다거나, 죽지 않기를 바라는 사람이 있다던가, 지금 이 마음이나 관계가 변하지 않기를 바란다던가⋯ 그런 이유들로.
실제로 가능성은 있어. 앞으로 20년쯤 더 연구가 지속된다면 성공할지도 몰라.
당장은 실패로 끝나겠지만, 오늘 이 실험을 밑거름으로 삼아서 말야.
아이비가 리아를 향해 고개를 돌립니다.
시선을 받으면 리아가 머뭇거리며 설명을 잇습니다.
리아 P. 아이아나:제가 있던 세계에서는 이 날, 자정이 되기 한 시간 쯤 전에 도시에 대정전이 일어나요. 도시에 있던 모든 전력이 멈췄어요. 비상 전력을 포함해 전부⋯ 30분정도.
병원이나 경찰, 소방서도 전부 마비돼서, 온갖 사건이나⋯ 사상자도 많이 나왔죠.
아이비가 리아와 이안을 번갈아봅니다.
아이비:그 저울은 모든 차원과 모든 시간대에서 존재해.
막아낼 가능성이 가장 높은 건 지금 이 세계의 이 시간대 뿐이야. 그건 오늘이 지나면 그들의 손에 숨겨져서 다시 밖으로 나오지 않을거야.
이안 J. 휴고:(한손으로 관자놀이 짚는다.) 미친 놈들은 하도 많이 봐서 웃음도 안 나오네요⋯. 좀 색다른 이유는 없나? 다들 하나같이 영생 같은 거에나 집착하고. 그래, 그래서 요약하자면 지금 이 세계에서 어떤 미친 사람들이 또 뭔가를 해서 세상이 멈춘 상태다? 이걸 해결하려면 거울을 부수는 방법 밖에 없다? 그런데 왜 하필 또 리아 씨가 나타난 거죠?
이안 J. 휴고:(흠칫⋯ 고개 피했다가 반응 보고 의아해진다. 뒤늦게 인식 장애 주문에 관련된 걸 떠올렸다. 그런데 괜히 목소리 가다듬게 되는 건 어쩔 수 없어서.) 큼, 네. 어떤 걸⋯?
리아 P. 아이아나:(이안 얼굴 한번 보고⋯ 뭐지? 잠시 갸웃. 그러다 만다.) 아, 일루미네이션 쇼는 몇 시부터 시작하나요?
직원: 저녁 10시 쯤 부터에요.
리아 P. 아이아나:크리스마스 시즌까지도 하고 있을까요?
직원: 별 다른 이상이 없다면 올 해 연말까지는 진행한답니다.
리아 P. 아이아나:그리고 올라올 때 티켓을 사야하는 것 같던데⋯ 미리 예약할 수 있나요? 데려오고 싶은 사람이 있어서요.
직원: 1주일 전부터 어플리케이션이나 홈페이지, 매표소에서 예약하실 수 있으세요.
리아 P. 아이아나:감사합니다. 아, 혹시 프로그램 팜플렛 같은 거 있나요? 떨어진 것 같아서.
직원: 아, 그런가요?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직원은 그렇게 말하며 안내 데스크를 뒤지지만, 찾는 물건은 나오지 않습니다.
그는 먼저 리아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직원: 죄송합니다, 손님. 5분정도 후에 다시 와 주실 수 있나요?
리아 P. 아이아나:아⋯ 알았어요. 근처에서 기다릴게요.
그리고 직원은 이안에게 말합니다.
직원: 2전망대 엑스트라 플로어에 비품실 있거든. 비밀번호 3426 누르고 안에서 팜플렛 다발 좀 꺼내와줄래? 아, 이거 마스터 비밀번호니까 기억해 두고.
이안 J. 휴고:(멍하니 바라본다. 이렇게 보니까 기분이⋯. 아니, 것보다 이곳에서 만난 건 우연인 줄 알았는데? 뒤늦게 정신 퍼뜩 차린다.) 죄송합니다⋯ 비밀번호가 뭐라구요?
직원: 얼빠져 있지 말고. 3426이야 3426. 제대로 기억해!
이안 J. 휴고:네, 다녀오겠습니다. (이렇게 쉽게 알게 될 줄은 몰랐다. 번호를 기억해두고 비품실로 향한다.)
팜플렛 보충을 돕고 나면 직원과 리아의 다음 대화를 마저 들을 수 있습니다.
직원: 기다려주셔서 감사합니다. 두 권 드릴까요?
리아 P. 아이아나:네. 감사합니다. SNS에서 사진으로 봤는데 예쁘더라고요.
직원: 겨울 일루미네이션 쇼는 특히 예쁘게 구성되거든요. 야경까지 합쳐지면 환상적이랍니다. 도시에서 가장 높은 곳이기도 하니까요.
리아 P. 아이아나:그렇구나.
그렇게 말하며 리아가 창 밖으로 고개를 돌립니다.
리아 P. 아이아나:크리스마스니까⋯ 이왕이면 가장 예쁜 걸 보여주고 싶어요. 이거라면 괜찮을 것 같네요.
하지만 이 일루미네이션 쇼, 괴도 소동 때문에 중단됐던 것 같은데⋯.
이후 이안이 카드의 전달까지 마친다면 언제든 세계를 떠날 수 있습니다.
이안 J. 휴고:(머리 좀 써봐, 이안 휴고⋯. 눈 질끈 감았다가 한박자 늦게 리아 어깨 붙잡는다.) 저기.
리아 P. 아이아나:(이안을 돌아보고 고개를 기울인다.) 으음⋯ 저기, 우리 어디서 만난적⋯ 있지 않나요?
이안 J. 휴고:예? 설마요. 제가 좀 흔하게 생기긴 했죠. (하하! 근데 이걸 어떻게 전한담. 한참 말 고르다가 허공에서 시선이 맞물렸다.) 별 건 아니고, 터키석이라고 들어보셨나요? 어딘가에서는 부적으로도 쓰인대요. 크리스마스 선물로 주기 딱이죠. 눈색을 보니까 생각이 나서⋯.
리아 P. 아이아나:으으음⋯ 그런가. (기우뚱하는 고개.) 아는 사람이랑 좀 닮아서 그랬나봐요. 그러니까⋯ 분위기가? 하하.
이런 오지랖 넘치는 부분이랄까. 그런게. (재미있다는듯 웃는다.)
그래도 고마워요. 마침 크리스마스 선물을 고민중이었는데. (하고 돌아가다가, 다시 뒤돌아보고) 참, 그럼 점을 싫어하진 않아요. 오히려 좋아하는 부분이랄까.
이안 J. 휴고:(눈 두어 번 깜박인다. 시간을 거슬러 온 게 아니라 멈춘 것 같다는 생각을 잠깐. 그럴 리가 없을 텐데⋯..) ⋯그렇게 말해주니⋯ 고맙네요. 저도, 어. 음. 두 분이서 좋은 시간을 보내기를 바랄게요. 그, 여기 상점가에 마라탕 집 맛있더라구요. 사람은 없어도 다시 한번 찾아올 만해요. 근처에 산타탕후루집도 그렇고. 분명 좋아할 거예요. (뜸.) 이것도 오지랖입니다.
리아 P. 아이아나:고마워요, 크리스마스는 아직 많이 남았지만 그래도 벌써 12월이니까⋯ 메리 크리스마스. 역시 너무 이른가? 그럼 어쩔 수 없구.
이안 J. 휴고:제 인사는 그 날 돌려드릴게요. (손 흔들어준다.) 조심히 들어가세요.
리아 P. 아이아나:아, 크리스마스 근무시구나. 그때 또 만나면 또 인사해드릴게요. 안녕히 계세요
이안 J. 휴고:(별일이 없으면 휴게실로 돌아간다. 카드를 두고⋯ 허공 잠시 봤다가 박수 두번.) 이번에는 어디 안 부딪히도록 부탁드릴게요.
아이비:나는⋯ 예전에 저울을 썼을 때, 죽은 동생이 남긴 스카프를 올렸어. 그 때는 평생 슬퍼하면서 지내고 싶었거든. 살아있다보면 언젠가 괜찮아질게 싫었으니까.
그건 잊어버린다는 거잖아.
그 애가 없어서 슬프다는 마음은 여전해. 조금도 닳지 않았어. 하지만⋯ 내 모든게 영원해진 이후로 전부 아무래도 좋아졌어.
무엇을 봐도 와닿지 않고 아무것도 특별하게 느껴지지 않아. 이제는 사람 하나하나를 어떻게 구별해야 하는지도 잊어버렸어. 어차피 아무런 의미도 없으니까. 마음에 뭐가 닿아와도 나는 영영 변하지 않는거야. 영원히 그 날 그대로⋯ 하지만 이건⋯
마음이 죽어있는거랑 마찬가지일지도 몰라.
나는 그 애가 정말 소중해. 그런 마음을 영영 소중히 여기고 싶었어. 그러니 다시 마음이 살아있는 때로 돌려두고 싶어.
아이비:그래서 저울을 파괴하는데에 도움을 줄 사람을 찾으러 갔는데, 문제가 좀 생겼거든.
원래 당신보다 먼저 찾아간 게 그 사람이었는데 말이야. 그 세계의 그 사람은 자격 미달이었어.
곧 삐걱이며 문이 열립니다.
미래의 리아가 들어옵니다.
양 손에 쇼핑백을 들고 있네요.
리아 P. 아이아나:이 시간대의 이안 씨랑 마주칠 뻔 해서, 조금 돌아오다가 늦었어요.
이안 J. 휴고:그 사람이 누구⋯. (말 채 끝내기 전에 익숙한 인영이, 하지만 익숙하지 않은 사람을 본다.) 뭘 그렇게 많이 사온 거예요?
리아가 들고 온 쇼핑백 안에는 스카이 빌딩의 직원 유니폼 두 벌과 후드가 달린 패딩, 망토가 한 벌씩 들어있습니다.
이건⋯ 이안이 게임을 했던 상대가 입었던 패딩, 그리고 보석을 채간 괴도가 입고 있었던 망토네요.
아이비:그럼 해야 하는 일을 설명할게.
아이비가 벽에 붙어있는 스카이 빌딩의 지도를 가리킵니다.
아이비:멜 록스의 저울을 파괴하면 모든 문제는 해결돼.
그러기 위해 필요한 건 저울 본체, 가장 최근에 올라갔던 축복받은 물건, 그리고 저울을 움직일 정도의 가치가 있을 새 물건.
마지막 건 네가 가지고 있어. 그러니 해야하는 일은 저울과 보석의 탈환.
보석은 2전망대 트리 꼭대기에 달려있지. 가까이 다가갔다가 무사히 도주하기 위해서는 사전 공작이 필요해.
메리의 집에 달린 굴뚝은 그 안에 있는 창고와 연결되어 있어. 그 창고에서는 2전망대의 직원층, 엑스트라 플로어로 바로 이동할 수 있고.
굴뚝을 미리 뚫어두고, 위로 올라가 요란하게 보석을 훔쳐내. 도망갈때는 다시 그 굴뚝을 통해 창고, 그리고 엑스트라 플로어로 빠져나와 직원인 척 이동하는거야.
아이비:엑스트라 플로어에는 모든 층에 이동이 가능한 직원 엘리베이터가 있으니까.
괴도 소동이 끝나고 적당한 타이밍에 스카이 빌딩에 정전을 일으키겠어. 그 전에 5층까지 내려와.
나는 동시에 저울을 빼내올테니 플라네타리움 안에서 합류하는걸로.
역할은 적당히 나눌까. 리아가 괴도를 맡고 이안이 아래에서 도와줘. 보석을 그 위에서 떨어뜨리려면 누군가 보석을 맞춰야 하니까.
이걸로.
아이비가 무언가 꺼내 이안에게 던집니다.
이안 J. 휴고:(얼떨결에 받아든다.)
이건⋯ 권총? 상당히 고풍스럽게 생겼네요.
아이비:손에 한 번 쥐면 목표는 빗나가지 않아. 그런 장치가 되어있어.
이안 J. 휴고:와, 이거 좀 탐나네요. (권총 이리저리 살핀다.)
아이비:그러면, 작전 개시까지 미리 준비해 둘 일 말인데. 먼저 리아는 메리의 집 굴뚝에 걸린 잠금 장치를 미리 풀어둬.
그리고 이안.
1전망대에서 이벤트를 하고 있어. 거기에서 져서 이 시간대의 너에게 2전망대 티켓을 줘. 당신이 2전망대에 있어야 나중에 관제실까지 올 수 있으니까.패러독스를 줄이기 위한 일이야.
지면 이긴 사람이 소원을 들어달라고 할텐데⋯ 뭐, 연락처라도 주고 도망쳐. 그리고 직원용 엘리베이터를 써서 2전망대의 엑스트라 플로어로.
나는 그 전까지 스카이 빌딩을 정전시킬 준비를 해 둘게. 따로 질문은?
이안 J. 휴고:(아, 진짜 나였잖아?) 네, 알겠습니다. 질문은⋯. 아, 그래서 먼저 찾아간 사람이 누구였다구요?
아이비:이 사람. (리아 눈짓합니다.)
곧 큰일날 수도 있는데 계속 사담할거야?
이안 J. 휴고:(빤) 당신 자격미달이래요. 다녀오겠습니다. (1전망대로 향한다.)
탈의실을 이용할 수는 없으니 창고에서 바로 직원용 유니폼으로 갈아입습니다.
망토는 리아가 쇼핑백을 이용해 따로 챙겨두는 모양입니다.
리아 P. 아이아나:제대로 입고 가요. (나가는 이안 붙잡고 옷매무새 다듬어줍니다.)
그러고보니 이안 씨⋯ 이렇게 어렸었구나.
⋯이 리아는 몇 살이나 된 리아일까요?
다른 세계라, 분명 이안에게는 오랜만이라고 말했었죠.
이안 J. 휴고:(멋쩍게 앞에 선다. 어린애 취급이 아니라 어린애가 되어버린 기분이다.) 그쪽의 나는 어때요?
리아 P. 아이아나:글쎄요⋯ 궁금해요? (옷 정리 끝내고 이안 반바퀴 돌려서 문을 향하게 하고 가볍게 민다.) 할 일부터 끝내고 와요.
이안 J. 휴고:(흘끔 뒤 돌아본다.) 다녀올게요. (이름은 차마 못 부르겠다⋯ 가볍게 발걸음 옮긴다.)
준비가 끝나면 세 사람은 각자의 장소로 흩어집니다.
아이비는 떠나가며
아이비:당신이 겪었던 일에서 크게 벗어나는 일은 삼가는 편이 좋을거야. 패러독스가 일어나니까. 말 한두마디 정도는 괜찮겠지만.
라고도 덧붙입니다.
이안이 먼저 향할 곳은 1전망대의 이벤트 코너네요.
인파에 섞여 고속 엘리베이터를 타고 1전망대로 향합니다.
어쩐지 기시감이 느껴지는 풍경.
저 구석, 둥글게 몰린 인파 속에서 환호성이 울리고 있습니다.
“자, 자! 소문의 핑크 다이아몬드를 관람할 수 있는 2전망대 입장권, 몇 장 남지 않았습니다!”
“관람객 분들의 1대 1 매치! 승자에게는 바로 사용할 수 있는 2전망대 입장권을 두 장 선물!”
⋯이것 또한 들어본 적 있는 내용.
중심으로 가까이 접근하면 반대쪽에, 이 시간대의 리아와 이안 자신이 보입니다.
대화를 나누고 있네요.
곧 이 시간대의 당신이 참가를 표명하며 손을 들어올립니다.
이안 J. 휴고:⋯ (후드 푹 눌러쓰고 손든다.)
이안 또한 손을 들어올리면, 약속된 것 마냥 두 사람이 게임 플레이어로 선택받습니다.
"종목은 가위바위보 단판승부!"
"하나! 하면 동시에 내는겁니다! 자!"
그때 뭘 냈더라?
이안 J. 휴고:(가위를 낸다.)
사회자가 이 시간대의 당신에게 마이크를 가져다 대고 있습니다.
“그럼, 소원을 말해보시겠어요?”
아, 귀찮아지기 전에 도망쳐야 할 것 같은데⋯
원래 어떻게 했더라.
문득 패딩 주머니에서 펜과 종이쪽지 하나가 만져집니다.
저 너머로 이 시간대의 리아가 멍하니 서 있습니다.
맞다. 그러니까 분명⋯
이안 J. 휴고:(급하게 종이 위에 제가 아는 가장 익숙한 전화번호를 휘갈긴다. 그리고 본인을 지나쳐⋯ 리아의 손을 잡고 쪽지를 쥐어준다.) 일행인 것 같은데, 필요하면 연락하세요.
잠시 정적, 곧 환호성이 이어집니다.
그 사이를 틈타 당신은 잽싸게 자리를 빠져나옵니다.
미션은 무사히 마쳤습니다.
이제 2전망대 엑스트라 플로어로 향하면 되겠네요.
이안 J. 휴고:(흘끔 보고는 2전망대로 향한다.)
무사히 자리를 벗어나 패딩을 어딘가에 벗어두고 직원복이 됩니다.
직원용 엘리베이터를 이용해 2전망대의 엑스트라 플로어로 이동합니다. '
이 곳은 제법 한산하네요.
대부분 위쪽에서 일하고 있겠죠.
주변을 잠시 둘러보면⋯
리아 P. 아이아나:이안 씨, 이 쪽.
작게 속삭이는 목소리.
구석의 문에서 미래의 리아가 빼꼼 고개를 내밉니다.
리아 P. 아이아나:조용히 와요.
그 쪽으로 향하면, 텅 빈 창고 안입니다.
이안 J. 휴고:(슬쩍 들어간다)
위로 올라갈 수 있는 사다리가 하나 내려와 있습니다.
전부 풀린 자물쇠들이 바닥에 구르고 있네요.
리아가 먼저 사다리를 타고 위로 올라갑니다.
리아 P. 아이아나:조용히 해야 해요. 올라가면 바로 메리의 집 안쪽에 있는 창고.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면, 불이 꺼진 회색빛 창고에 새어들어온 조명빛이 여러 비품을 비추고 있습니다.
먼지 쌓인 뜨개 직물, 카페트, 손상된 흔들의자⋯ 메리의 집을 꾸미고 남은 소품들이겠죠.
굴뚝으로 올라가는 사다리와 커튼이 쳐진 창문 하나도 보입니다.
리아 P. 아이아나:시간이 되면 전 굴뚝으로 올라갈게요.
라고 말하며 리아는 망토를 뒤집어 씁니다.
리아 P. 아이아나:이안 씨는 저 창문쪽에서⋯ 타이밍 맞춰서 보석을 맞춰 줘요.
그리고, 짧게 침묵.
한 템포 느리게 그가 입을 엽니다.
리아 P. 아이아나:그러네요. 슬슬 크리스마스지. 이 맘때쯤 여기 당신과 왔었던 거⋯ 잊고 있었어요.
이안 J. 휴고:왜, 그쪽 크리스마스에서는 함께 보내지 않았나봐요?
리아 P. 아이아나:⋯그렇죠. 나는 지금 이 세계와 아주 닮은 세계에서 왔어요. 어쩌면 이 세계의 미래일지도. 오늘 이 곳에서 도시 대정전이 일어난 후 꽤나 많은 시간이 흐른 후거든요.
꽤 많은 것들이 달라졌어요. 당신도, 나도.
이안 J. 휴고:(권총 만지작 거린다.) 당신 혼자 여기 온 거면 그럴 이유가 있다고 생각했어요. 음⋯. 무멍라고 불러야 할 지 모르겠네. 아이아나 씨
뭐가 달라졌길래요.
리아 P. 아이아나:⋯그러니까 되게 거리감 느껴지네요. 아무래도 이젠 남이니까 그럴만도 하다 싶지만.
별 이야기는 아녜요. 난⋯ 더이상 괴도로 있지 않게됐고, 또 도망쳤어요. 그냥 그게 전부.
이안 J. 휴고:이러지도 않으면 헷갈릴 것 같아서요. 하하, 뭐가 당신을 도망치게 했으려나⋯ 별로 믿음을 못 줬나봐요, 그쪽 세계의 내가.
리아 P. 아이아나:어쩌면 그랬을지도 모르죠. ⋯당신이 죽을 뻔 했어요. 나때문에. ⋯당신이 준 믿음보다 당신을 잃을까봐 두려웠던게 더 커서. 필연적으로 팬텀 화이트 포시티아도 은퇴해야 했죠. 그런데 또 괴도 역할이라니. 하하.
이안 J. 휴고:(시선이 가늘어진다.) 죽을 뻔한 건 이쪽의 저도 마찬가지에요. 그쪽 세계의 나도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면, 아마도 아직도 찾고 있겠네요. 아니, 아마 분명히 그러고 있을 거예요. 나는 나를 믿으니까. 네, 저라면 분명 떠난 당신을 찾을 거라고 믿어요. 영원히.
리아 P. 아이아나:⋯이제 저는 예전의 저와는 다른 사람인걸요. 배우 일도 관뒀어요. 이사도 하고, 번호도 바꾸고⋯ 사람들의 안위보다 제 퇴근이 더 중요한 재미없는 회사원인데. 그래도 절 찾을 것 같아요? 모르면 그럴 수도 있겠죠. 그치만 실망할걸요, 분명.
이안 J. 휴고:실망하면 실망하는 거죠? 저랑 같이 다니면서 실망했어요! 이런 소리 한 번도 못 들어봤어요? 그래도 다시 찾겠죠. 또 이번에는 어디로 도망갔을까, 이번에야 말로 구속장에 넣어두고 지켜볼까⋯ 생각하면서요. 그러니까, 실망한다는 게 당신을 버리겠다는 뜻은 아니잖아요⋯.
리아 P. 아이아나:그런건 아니지만. ⋯이젠 절 만날 이유도 없고, 시간도 많이 지났는걸요. ⋯이런거에 굴할 당신이 아니란건 알지만. ⋯그래도 마주하기 무서워서.
이안 J. 휴고:만날 이유가 왜 없어요? (황당한지 뭔지⋯.) 지금 내가 당신을 찾고 있다고 하잖아요,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거 아니에요?
리아 P. 아이아나:득 되는 것도 없을텐데. ⋯변명이라고 생각하죠? 알아요, 잔소리 하지 마세요. (미리 차단한다⋯)
이안 J. 휴고:뭐야? (어이없다는 듯 뱉어놓고 웃음 터뜨린다.) 하하, 완전 다른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이제 보니 퍽 비슷한 것 같기도. 리아 씨, 만약 내가 생각하는 게 맞다면 아마 당신에게 크리스마스 선물이 갈 것 같네요.
리아 P. 아이아나:왜, 왜 웃어요?! 그리고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건지⋯ 당신이 산타라도 된다고 생각해요? 정말이지⋯
이안 J. 휴고:그건 그쪽 세계의 저한테 가서 물어보도록 해요. (창밖을 본다. 의도적으로 답을 피하는 게 맞다.)
리아 P. 아이아나:허어⋯ (기가 차다는 투다. 고개를 홱 돌려버린다.) 됐어요, 이제 시간 됐거든.
괴도, 완전히 관뒀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다시 하게 될 줄은⋯
리아가 일어섭니다.
리아 P. 아이아나:⋯다녀올게요? 이 세계의 나에 비해 빛나지는 않겠지만.
그는 그렇게 말하며 사다리를 타고 올라갑니다.
이안 J. 휴고:저도 이렇게 괴도가 되어보는 건 처음이네요! (뒤에다 대고 소리친다. 권총을 제대로 쥐고 창문을 연다.)
그리고 잠시 기다리면⋯⋯⋯
“저기 봐! 누군가 있어!”
팟, 조명이 꺼지는 소리.
창고 안 쪽으로 새어들어오던 빛이 사라집니다.
2전망대에, 소문의 괴도가 나타납니다.
어둠 속에서 창문을 통해 몸을 기울입니다.
굴뚝 위에 서 있는 리아의 모습이 보입니다.
그가 천천히 양 손을 들어올리는 것을 보고, 당신 또한 총으로 보석을 겨눕니다
총이 팔을 이끄는 듯한 기묘한 감각.
정확하게 보석을 겨냥하면⋯
짝, 하고 가느다란 박수소리가 들립니다.
동시에 당신은 공포탄을 발포합니다.
탕! 트리가 흔들리고 보석이 리아의 손에 떨어집니다.
성공했다!
다시 창고 안으로 들어오면 2전망대를 뒤흔드는 듯한 거대한 환호성이 들립니다.
또 모든 조명이 소등되면 리아가 굴뚝 위에서 안 쪽으로 다시 나타납니다.
리아 P. 아이아나:저, 뛰어내릴테니까 받아줘요!
그는 그렇게 말하고 저 위에서 이안을 향해 단번에 뛰어내립니다.
이안 J. 휴고:네?! (왠지 이 상황 익숙⋯. 잠시만-) 리아 씨! (단말마 같은 호명- 그리고 두 팔을 뻗는다.)
아이비:내가 언젠가 그랬던 것처럼 평범하게 이 저울을 사용하면 당신도 영원을 손에 넣을 수 있어. 당신이 원할 때, 가장 최고의 당신으로 스스로를 고정시키거나⋯ 그 사람들처럼 연구한다면, 원하는 다른 무언가를 영영 변하지 않게 만들 수도 있겠지. 어쩌면 그건 그 가능성까지 포함한 선물일지도 몰라.
그건 당신에게 주어진 거야. 그러니 당신에게도 선택할 권리가 있어.
어떻게 하고 싶어?
이안 J. 휴고:거참, 거창하게 이런 도구를 쓸 필요가 있어요? 애초에 전 연구 같이 엉덩이 오래 붙이고 있어야 하는 일에 소질도 없거니와⋯ 지금 이 순간에 박제된 나의 마음은 영원한 거잖아요. (팔찌를 저울 위에 올린다.)
이안이 저울을 사용하기를 거절한다면, 아이비는 희미하게 웃습니다.
그는 낡은 저울을 들어올려 접시 반대 편에서 추를 빼내고 새 접시를 답니다.
이건⋯ 이제 저울이라기보다 천칭같은 모습이네요.
아이비:한 쪽에 보석을, 다른 한 쪽에 당신의 물건을 올려.
두 물건을 천칭 양 쪽에 올립니다.
한 쪽은 거대한 다이아몬드, 그리고 한 쪽은 당신이 오늘 리아에게 받은 물건입니다.
무게도, 크기도 너무나 차이가 나는 두 가지의 물건을 올려놓고도 천칭은 고정된 것처럼 조금도 움직이지 않습니다.
아이비는 천칭을 높이 들어올립니다
아이비:내가 하는 말을 따라해줘.
멜 록스여, 보라.
보다 더 밝은 빛에 축복을.
이안 J. 휴고:멜 록스여, 보라. 보다 더 밝은 빛에 축복을.
그러자, 천칭이 천천히 기울어지기 시작합니다.
다이아몬드가 허공에 떠오르고 리아의 선물이 조금씩 가라앉습니다.
그렇게 천천히, 천천히 움직이더니⋯
툭. 천칭의 쇠막대가 반으로 깨져 부러집니다
리아가 준 선물이 당신의 손으로 떨어지고, 다이아몬드는 땅을 구릅니다.
아이비:⋯ 끝났구나.
아이비가 작게 속삭입니다.
아이비:이제 다시 그 애를 떠올리면서 웃어도 되는거야.
아이비의 몸이 천천히 반투명해집니다.
그가 주변에서 날아다니던 빛의 구체 두 마리를 양 손에 모아, 당신에게 보내듯 밀어줍니다.
아이비:이 둘을 따라 걸으면 두 사람 다, 각자의 시간대로 돌아갈거야.
당신도 저울을 손에 쥐었으니, 조금 더 헤멜지도 모르겠지만⋯ 그 사람이 마중올테니까.
그럼, 이만 갈게.
이안 J. 휴고:벌써 하는 거예요? (깜박.) 잘 가요, 아이비. 그러니까, 저. 메리 크리스마스.
아이비:⋯응, 메리 크리스마스.
말을 끝내면, 아이비는 빛과 함께 완전히 사라집니다.
이안의 주변으로 빛의 구체 두 개만이 남습니다.
빛의 구체가 하나 리아에게 이동해 빙빙 돌더니, 다른 한 쪽 구체와 함께 플라네타리움을 빠져나갑니다.
리아 P. 아이아나:생각보다는 금방 끝났네요.
그 뒤를 천천히 걷습니다.
두 빛은 5층의 외부 계단으로 향합니다.
이 위는 1전망대로 이어진 것 같네요.
따라오라는 듯, 두 빛이 천천히 돌며 앞을 밝힙니다.
리아 P. 아이아나:그 애, 세계를 떠돌다 제가 했던 선물이 저울을 움직일 수 있다는 걸 알았대요.
그래서 저한테 먼저 온 거죠. 하지만, 뭐⋯
그래, 저도 샀었어요. 그거랑 같은 팔찌. 하지만 저는 못줬거든요. 대정전이 났으니까, 시기를 놓쳐서. 그 이후로 시간도 많이 흘렀고, 이제는 어디로 갔는지도 모르겠네요.
게다가⋯ 봐요. 그거, 마음을 재는 물건이라며.
저도 많이 변했으니까. 이젠 그 시절같진 않고요.
곧, 양 쪽으로 나뉘어지는 계단이 나타납니다.
리아 쪽의 구체는 왼쪽으로, 이안 쪽의 구체는 오른쪽으로 향합니다.
서로 각각 다른 계단을 걷습니다.
모습은 보이지 않고, 반대편에서 목소리만이 들려옵니다.
리아 P. 아이아나:시간이 흐르면 나는 이제 당신과 함께 이런 크리스마스를 보냈던 것도 잊고.
저도 당신도, 이 무렵에는 서로 달리 시간을 보낼 사람이 생겨서 이제 저희 사이에 그 시절만큼의 마음은 담을 수 없게 됐네요.
단순히 그 선물을 주지 못해서만 그랬다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어떤 이유로든, 어떤 형태로든 우리는 변했을테니까. 내가 변하지 않는다면.
하지만⋯ 이안 씨.
다음 층계참에서, 두 계단이 다시 만납니다. 반대편에서 리아의 모습이 나타납니다.
리아 P. 아이아나:거리가 달라지고 마음의 형태가 어떻게 변해도⋯ 어느 날 문득 다시 떠올려내면, 맞아, 그랬었지,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