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어/시로
[CoC] 시로 - 보헤미안 로망스
시크SYK
2025. 3. 16. 00:31
KPC | PC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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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락시누스 "애쉬" 엑셀시어 | 글로디스 마셜 |
시나리오 제목 | 시나리오 링크 | 엔딩 |
보헤미안 로망스 | https://www.postype.com/@rpgstuff/post/18522029 | END |
플레이 날짜 | 플레이 타임 | 트리거 요소 |
2025년 3월 14일, 16일 | 8시간 |
중앙역 근처의 숙소를 막 나선 당신의 어깨에 가벼운 짐색이 달랑거립니다.
상아처럼 새하얀 벽돌 건물들에 저마다 뾰족한 지붕이 얹혀 있고,
길거리는 분주하게 움직이는 행인들로 복잡합니다.
푸른 하늘, 탁한 강물 위를 천천히 유영하는 배,
하나둘 켜지기 시작하는 가로등, 바뀌는 신호등,
카페 테라스에서 풍겨 오는 고소한 빵 냄새⋯
당신은 이곳에 홀로 여행을 왔습니다.
본격적으로 회사일이 바빠지기 전 짧게 휴가를 왔죠.
산타와 낭만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설레는 여행지겠지만,
글쎄요.
오늘은 크리스마스가 아닙니다.
산타를 믿을 나이도 한참 지나왔구요.
그래도, 완연한 봄이 찾아오기 전에 즐길 정도는 될 겁니다.
계획했던 오늘 저녁의 관광 코스는 구시가지 광장과 카를 다리입니다.
아직 식사를 하지 않았으니 광장에 있는 적당한 가게에서 끼니를 때우고,
광장 이곳저곳을 구경하며 시간을 보낼 생각입니다.
대부분의 관광 명소는 입장을 마감한 시간이므로 겉핥기 정도로 그치겠지만요.
그 뒤에 밤이 깊어지고 나면 블타바 강 저편과 이편을 잇는 카를 다리의 야경을 본 뒤 다리 너머의 길거리를 잠시 산책하다가 숙소로 돌아올 예정입니다.
구시가지 광장과 천문시계,
마리오네트 극장,
틴 성모 마리아 교회,
카를 다리.
8시가 지난 뒤에도 즐길 수 있는 곳들을 당신이 직접 골라 둔 것입니다.
차례대로 가볼까요?

중세부터 현대까지의 온갖 건축 양식으로 지어진 파스텔톤의 건물들이 광장에 즐비합니다.
르네상스, 고딕, 바로크, 로코코. 눈을 돌리는 곳마다 11세기부터 간직된 광장의 오랜 역사가 시야에 담깁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높은 것은 회갈색 벽돌로 지어진 구시청사의 뾰족탑 건물로, 화려한 천문시계 탑이 그 앞을 장식하고 있습니다.
광장 한가운데에는 밝은 청록빛의 얀 후스 동상이 우뚝 서 있습니다.

기준치: | 50/25/10 |
굴림: | 42 |
판정결과: | 보통 성공 |
포장도로에 금속으로 박혀 있는 약 2피트 너비의 자오선 표시를 볼 수 있습니다.

(극점을 생각해보다가 말았다.)
사람들이 모이는 곳에 따라 시선이 움직입니다.
천문시계 탑에는 정교하고 아름답게 세공된 두 개의 시계판이 위아래로 붙어 있습니다.
위쪽에는 세 가지 색깔의 원들이 겹쳐진 시계판 위에 눈에 확 띄는 금색으로 로마 숫자들과 별자리 기호 등이 붙어 있습니다.
아래쪽에는 금색 바탕에 황도 12궁과 농경 절기를 나타낸 정교한 달력 그림이 새겨져 있습니다
이 시계에서는 매 정각마다 음악소리가 들리고 시계에서 작은 모형들이 튀어나오는 오를로이 퍼포먼스를 관람할 수 있다고 합니다.

기준치: | 45/22/9 |
굴림: | 52 |
판정결과: | 실패 |
퍽 아름다운 건축물입니다.
여행 가이드북이나 인터넷 페이지에서 본 시계 사진이 일부분이 떠오릅니다.
지금 시각은 7시 20분.
아직 정각이 되려면 멀었고,
날씨가 좋은 날이니 기왕이면 시계가 보이는 자리에서 저녁 식사를 해도 괜찮겠군요.

야외 테라스가 있는 카페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부드러운 소고기 안심과 바삭한 빵, 새콤달콤한 크랜베리소스가 어우러진 체코의 전통 요리 스비치코바,
돼지고기 너클과 생맥주,
샌드위치, 윙과 감자튀김, 체코식 슈니첼 등을 팔고 있습니다.
사람 좋은 인상의 주인이 당신을 반겨 주며 원하는 자리에 앉으라고 합니다.

(스비치코바와 생맥주가 좋으려나.)
카페 주인:프라하는 처음이신가봐요. (물을 떠다주며)

카페 주인:아하, 그러면 이걸 또 드릴 수 밖에 없지.

카페 주인은 냉장고에서 코폴라라고 써진 음료수를 가져옵니다.
서비스라면서요.
또한 내일 점심시간에는 카페 이벤트가 있어 전 메뉴가 20% 할인되니 내일도 방문해 달라고 귀띔합니다.

카페 주인:(크흠) 주문은 뭘로 도와드릴까요?

얼마 지나지 않아 주인이 음식을 들고 옵니다.
음식들은 갓 만들어져 따끈따끈하며 양이 많고 맛있습니다.
식사를 하다 보면 천문시계의 정각 퍼포먼스를 구경하려는 행인들이 거리에 점점 늘어나기 시작합니다.
미리 명당 자리를 차지한 건 다행인 일이군요.
째깍, 째깍. 바늘이 8시에 다가서면,
하는 종소리와 함께 시계 위의 창문이 열리며 각자의 상징을 품에 안은 12사도의 정교한 조각이 창문 사이를 지나가기 시작합니다.

기준치: | 50/25/10 |
굴림: | 15 |
판정결과: | 어려운 성공 |
시계의 우측에 위치한 작은 해골 모형이 종을 치는 모습과 작은 사람 모형들의 몸이 흔들리는 모습도 미세하지만 똑똑히 눈에 들어옵니다.
시계가 여덟 번 울리고 퍼포먼스가 끝나자 몰려들었던 사람들은 시시하다는 듯 삽시간에 흩어집니다.
그때, 문득 귓가에 속삭이는 누군가의 목소리를 들었던 것 같습니다.
: "진짜네."

스스로가 대답하는 목소리 역시 귓전을 스친 것 같습니다.
당신의 입술은 꿈쩍하지 않았는데도요.
착각이었을까요?
언젠가 이 천문시계 아래에서,
누군가의 눈을 들여다보며 꼭 그런 말을 했었던 것만 같습니다.
⋯하지만 그럴 리가 없죠.
당신은 프라하에 초행이고 함께 영원을 바랄 상대 또한 없는걸요.
모든 것이 착각인 양 고요한 거리에는 이따금 지나가는 이의 발자국 소리만이 울립니다.

찬 공기를 맞으며 걷다보면 정신이 조금 깰지도 모르겠습니다.
슬슬 일어나 볼까요?

다음으로 볼 곳은 마리오네트 극장이군요.
정교한 인형극을 관람할 수 있는 프라하의 명소로, 1991년부터 매일 모차르트의 오페라 <돈 지오반니>를 공연하는 것으로 유명합니다.
8시까지 진행되는 돈 지오반니의 정규 공연은 종료되었으나 이번 시즌에는 예외적으로 정규 공연 이후에 프라하의 민담을 기반으로 구성한 단막 특별극이 편성되어 있습니다.
30분 정도의 짧은 분량이라고 하니 잠시 들러 구경해도 좋겠어요.


기준치: | 65/32/13 |
굴림: | 45 |
판정결과: | 보통 성공 |
영어 자막이 제공되니 어렵지 않게 극을 알아듣습니다.
인형극은 어머니를 여읜 금발의 잘생긴 소년 보이테흐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어른이 되어 여행을 떠난 보이테흐는 공주로 변장한 마녀의 성을 찾게 되고, 성의 마구간에 일자리를 구합니다.
마녀는 마구간 구석에 있는 어린 말에게 여물을 주지 말고 채찍으로 호되게 때리라는 가혹한 명령을 내리지만 보이테흐는 마녀 몰래 어린 말을 잘 돌보아 줍니다.
그러자 어린 말은 마녀가 자신의 계모이며 마법으로 자신을 말로 변신시켜 구속해 둔 것이라는 사실을 털어놓으며,
여물통 아래에 있는 마법 칼로 마녀를 물리칠 수 있다고 알려줍니다.
보이테흐가 말의 설명을 따라 마법 칼을 휘두르자 마녀는 목이 잘려 죽고 어린 말은 잘생긴 왕자로 변해 보이테흐에게 좋은 옷과 재산을 하사합니다.
⋯세계 어디에나 있을 법한 민담이네요.
어쩌면 영국이나 멕시코에도 비슷한 이야기가 있을지 모릅니다.

(조금 더 여운 남는 이야기였다면 좋았을 뻔했다. 자리에서 일어난다.)
자리에서 일어납니다.
해는 졌지만, 성당으로 향하는 길은 아직 밝군요.
14세기 중반부터 16세기 초반까지 지은 프라하에서 가장 인상적인 고딕 양식의 성당 건물 중 하나입니다.
마돈나와 아기 예수, 이른바 틴 마돈나(Tyn Madonna)가 오른쪽 통로의 벽 옆 네오고딕 양식의 제단 위에 서 있습니다.
틴 마스터의 작품인 갈보리는 왼쪽 통로 끝에 있는 바로크 양식의 제단에 있습니다.

기준치: | 65/32/13 |
굴림: | 64 |
판정결과: | 보통 성공 |
어렴풋이 한 문장을 떠올립니다.

기준치: | 55/27/11 |
굴림: | 46 |
판정결과: | 보통 성공 |
행인1: 그거 들었어?
운켈트의 유령 전설 말이야.
: 이 지역에서는 튀르키예 출신의 젊은 상인 유령이 출몰하는데, 그는 사랑하던 애인이 다른 남자와 결혼하는 것을 참지 못하고 질투심에 연인을 살해했다더군.
그 죄책감과 후회를 견디지 못하고 영영 이 거리에 영혼이 묶여 있는 신세라던가?
행인2: 성당 안에서 할 소린가, 그게.
⋯본인들만의 이야기를 이어가던 행인들은 곧 지나갑니다.

더 볼 것은 없겠군요.
예배당에서 기도나 드리고 갈까요?

(덜 미워하고 살 수 있게만 해주십시오.)
침묵이 답합니다.
지금 세기에 신의 음성을 듣는 건 어렵죠⋯.
자, 이제 프라하에서 가장 오래된 다리로 가볼까요?

프라하에서 가장 오래된 다리로, 체코의 성인들을 묘사한 서른한 개의 석상이 다리 위에 장식되어 있다고 합니다.
그 가운데에는 만지면 소원을 이루어주는 조각상도 있다고 하던데⋯
생각해 보니 스크랩해 온 가이드북에 정확히 어느 상인지 명시된 대목은 빠져 있군요.

기준치: | 65/32/13 |
굴림: | 65 |
판정결과: | 보통 성공 |
당신은 찾는 것이 다리에서 가장 유명한 얀 네포무츠키 신부의 조각으로,
석상밖에 없는 다리 위에서 유일하게 청동으로 만들어져 있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체코의 수호성인으로, 그의 상 아래에 달린 동판을 만지면 좋은 일이 일어난다는 전설이 있다고 합니다.
신부의 조각을 만지며 소원을 빌면 그것이 이루어지며,
신부 옆에 있는 왕비의 조각을 만지면 언젠가 다시 프라하에 돌아올 수 있게 된다고도 합니다.


기준치: | 45/22/9 |
굴림: | 40 |
판정결과: | 보통 성공 |
동상의 표면을 타고 누군가의 간절한 기도가 당신에게로 흘러들어오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마법에 홀린 사람처럼 그 자리에 붙박여 서서 짧은 환영을 봅니다.
다리 위의 동상들이 하나 둘씩 살아나더니, 받침대에서 뛰어내려 춤을 추고 다시 제자리에 올라갑니다.
하지만 정신을 차렸을 때 모든 것은 잠잠했습니다.
정말 취하기라도 한 건지⋯.

(스스로 뺨 찹찹 친다. 오늘 좀 이상하다.)
다리를 건너봅시다.

조금 걷다 보면 말라 스트라나 지구가 보일 거예요.
'말라 스트라나'라는 이름은 '작은 동네'라는 뜻을 지니고 있으며,
시민들이 거주하던 프라하성 아래의 주거 구역입니다.
아담한 집들과 상가가 늘어선 이 거리는 특별히 점찍어 둔 관광 명소는 아니더라도 아기자기하게 구경하는 재미가 있을 겁니다.
골목을 지나던 당신은 좁은 길 두 개가 합쳐져 넓은 거리가 되는 지점에 도달합니다.

체코에 방문한 이래 길거리에서, 관광지에서, 건물 안에서 수많은 조각상들을 보았지만 이번만은 조금 특별합니다.
눈에 들어온 석상은 정교하게 조각되어 그런지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생생합니다.
그러나 그 때문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제대로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조각상이 마치 당신을 끌어들이는 듯한 기분이 듭니다.


기준치: | 65/32/13 |
굴림: | 73 |
판정결과: | 실패 |
석상 발치에 간략한 설명을 발견합니다.
체코어로 되어있어 읽기는 어렵겠군요.
그런 것보다도 당신의 시선을 가장 잡아끄는 것은 조각상의 가슴에 달빛을 받아 반짝 빛나는 무언가입니다.
브로치처럼 보이는데, 원래부터 조각상의 일부였던 것 같지는 않고.
어쩌면 누군가 걸어둔 것일지도 모릅니다.

브로치에 손이 닿고,
자연스레 그 아래 돌로 된 표면에 손끝이 닿는 순간⋯
이상하게도 느껴지는 것은 사람의 체온입니다.
묘한 기분에 휩싸여 눈을 들어 보면,
미동도 않던 조각상 위로 희끄무레한 빛이 번져나가고 있습니다.
옅은 잿빛의 신발이 앞을 향해 내딛고,
양각으로 엷게 새겨진 눈동자가 도르르 구르며 주변을 둘러봅니다.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인지 자각하기도 전에,
조각상은 받침대에서 뛰어내려 당신의 눈앞에 서 있습니다.

별빛이 내린 길거리에 마주보고 선 인영이 두 개.
달콤한 밤 공기가 돌처럼 창백한 사람의 뺨에 반사되며 일렁입니다.
살아 움직이는 석상을 두 눈으로 목격한 글로디스,

기준치: | 45/22/9 |
굴림: | 53 |
판정결과: | 실패 |
이성 1 차감합니다.
그 순간, 마치 세계가 이전과는 다른 빛깔을 띠는 것만 같습니다.
밤을 휘적시는 공기의 무게도,
등 뒤에 배경으로 비치는 강의 물결도,
어쩐지 달라진 것만 같습니다.
그런 단어가 당신의 머릿속에 계시처럼 뛰어듭니다.
눈이 마주칩니다.
조각된 상대의 눈동자가 빛을 내며 당신을 빤히 쳐다보고 있습니다.
뒤이어, 흰 입술이 열리고 조각상이 소리 내어 말합니다.

마치 기차 옆자리에 앉은 사람을 대하듯 아무렇지 않게 말을 걸어 옵니다.


미스터, 지금 스스로 한 말에 모순이 있는 건 알지? 기시감을 느낀다고 해놓고 통성명이라니.
글로디스 마셜. (언론에서는 간혹 독사라고도 부르던데. 굳이 말하지 않았다.) 어떻게 불러도 상관은 없어.


그렇게 불리니까 여행 와서도 출근한 기분이다?


그러니까, (⋯) 애쉬?
마다할 이유가 없는데, 너⋯. 초면한테 언어 선정은 신중해야 하지 않겠어. (제 몸 위로 팔짱 끼고 느리게 웃는다.)

⋯음? (이상함을 눈치 못 챘다.) 그래서 동행은 별로라고?

별개로 동행 건은 좋아. 좀 외롭던 참이라.

여행 가이드북을 제공합니다.






카를 다리 아래의 인공 섬입니다.
사실 섬이라기보다는 다리에 붙어 있는 작은 마을에 가깝습니다.
육지와 섬 지역을 갈라놓는 유일한 물은 캄파 섬을 따라 730미터가량 이어져 있는 좁은 수로 체르토브카뿐이기 때문입니다.
캄파의 경계를 이루는 이 수로의 양쪽 끝은 물레방아 다리를 통해 연결되어 있습니다.
다리에는 영원을 기약하는 수많은 연인들의 자물쇠가 매달려 있네요.
누구에게나 사랑하는 이와 영영 이별하고 싶지 않은 마음은 동일할 것입니다.
글로디스와 애쉬 역시도.
⋯어라?
잠깐, 사랑하는 이에 대해서 생각한 순간 갑자기 애쉬가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이상합니다.
애초에 그와는 오늘 밤 처음 만난 것에 불과하며 그는 사람도 아닌 조각상일 뿐이라고요.
기분이 미묘해집니다.


간절하니까 그런 이야기도 도는 거지? (이번엔 영어였다.)




상식적으로 저런 거 매단다고 영원이 막 이루어지진 않잖아. 그래도 꾸역꾸역 다는 것에는 이유가 있지.


어느 이론서도 그걸 완벽히 담고 있지 않다고들 하더라.

글로는 전부 담을 수 없는 감정인가봐, 그게. 직접 하면 완벽하게 이해할 수는 있고?
수로 앞에는 'BOAT TRIPS' 라고 적혀 있는 안내판이 붙어 있으며 깜깜한 밤이라 선원은 보이지 않지만 두 대의 곤돌라가 정박해 있습니다.
배를 타고 수로를 따라 내려갈 수 있는 여행 코스가 있기에 이곳이 프라하의 베네치아라는 이명을 가지고 있는 것이죠.
곤돌라를 연결하는 사슬을 푸는 것은 쉬워서 원한다면 몰래 배를 탈 수 있습니다.

(⋯⋯) 조각상 배 태워주겠다고 이런 행위를 하는 건 위험 부담이 큰데. (사슬 만지작⋯)
타고 싶어?

⋯⋯.
⋯어때 보여? (배를 빤히 쳐다본다⋯.)

(사슬을 푼다.)


⋯⋯
(무슨 조각상이 감정 표현을 저렇게 선명하게 해?)




두 사람은 배를 타고 수로를 따라 내려갑니다.

기준치: | 20/10/4 |
굴림: | 24 |
판정결과: | 실패 |
(캡틴도 다 옛날 얘기라는 거지⋯⋯⋯)
기슭을 만날 때마다 계속해서 부딪힙니다.


그 순간, 강으로부터 분홍빛 해파리 한 무리가 공기 속을 유영하며 먼 하늘로 점차 멀어져 갑니다.
투명하게 보이는 해파리 체내의 장기 속에는 소화되고 있는 구름 조각이 비칩니다.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건가요?

기준치: | 44/22/8 |
굴림: | 2 |
판정결과: | 극단적 성공 |
이성 변동 없습니다.

또한 피아노 건반들과 커틀러리가 물고기처럼 펄떡펄떡 뛰어오르다 뱃전에 부서집니다.

(몸 기울여서 물에 손 집어넣고 상대에게 뿌린다.)

하나만 묻자.




(그렇다면 망설일 이유가 없다. 허벅지 꼬집어준다.)

아프잖아.





기준치: | 65/32/13 |
굴림: | 97 |
판정결과: | 실패 |
배가 한번 휘청 거립니다.
다행히 배가 뒤집어지지는 않았군요.



그 자세로 한다는 게 고작 볼 꼬집기야?


보통 인간은 그렇게 무릎 한 쪽 꿇으면서⋯⋯ 청혼이란 걸 하거든? 응? 아껴두라는 소리지.

두근, 두근.
이건 당신의 심장 박동 소리인가요?
아닙니다.
수면이 살짝 위로 들렸다가 다시 떨어지는 느낌이 몇 번이고 듭니다.
무언가 아주 거대한 것, 집채만 한 심장이 발아래서 고동치는 듯합니다.
그것이 박동할 때마다 혈관을 타고 흐르듯 색색의 구슬들이 수면을 뚫고 나와 첨벙댑니다.
이만 나가는 게 좋겠어요.






에펠 탑을 연상시키는 높은 전망대가 우뚝 서 있는 언덕으로, 높이는 약 320미터 정도입니다.
언덕을 따라 선로가 깔려 있으며 낮에는 푸니쿨라라는 이름의 트램을 타고 오갈 수 있지만 밤중에는 당연히 운행하지 않습니다
공원 부지를 걸어 올라가는 방법도 존재하며 언덕에 난 풀잎과 빼곡히 서 있는 나무들까지, 눈이 닿는 곳마다 싱그러운 녹색을 띠고 있습니다.



관찰에는 재능이 없거든. (후천적인 사유지만. 덧붙이고 다시 언덕을 본다.)



별자리를 읽을 줄 알아?

읽을 줄 알았었지.

문득 고개를 들면,
나뭇가지에 이불보처럼 얇고 넓은 색색의 천들이 묶여 넘실거립니다.
바스락거리는 이불을 헤치며 걷는다면 천 사이에서 솔잎과 이국적인 향신료의 내음이 감돕니다.
어쩐지 퍽 익숙한 향이군요.
언덕을 오르다 보면 멀리 과수원과 장미 정원이 보입니다.


그래서 그런가? 처음 맡는 향인데 거부감은 안 드네. (상대 쪽으로 몸 기울이더니 작게 숨 들이마신다.) 이쪽에서 나는 향이었나?

여행길이니까 특별히 뿌린 건 없어. (어깨 툭 잡아 뒤늦게서야 슥 밀어낸다.) 체향이라는 소리다, 음험한 조각상.

언덕 위에서 문득 고개를 들어 보면 밤하늘을 가득 메운 수천 개의 별빛이 쏟아질 듯 눈에 들어찹니다.
도시 특유의 번쩍이는 조명이 거의 없는 장소이기에 이곳의 밤하늘은 몇백 년 전의 하늘과 다를 바 없이 맑습니다.
소설 속에서처럼 유성우가 되어 품속에 떨어져 내릴 것 같은 별들을 한참 바라보고 있으면,




그 감상은 제법 인간 같았어. (웃는다⋯)

머쓱한 얼굴로 서로를 바라보고 있으면 난데없이 푸하하 웃음이 터집니다.
물고기의 은빛 비늘 같은 것이 꽃잎이나 눈송이처럼 하늘에서 춤추며 내려옵니다.
이곳저곳이 번들거리는 비늘로 뒤덮여서 수생 생명체의 피부 위에 서 있는 기분에 휩싸입니다.


내려가자, 응.
다음은 어디로 향하나요?



(일단 간다. 수도원으로.)

1149년 지어진 스트라호프 수도원의 건물들에는 르네상스와 바로크 양식이 조금씩 반영되어 있습니다.

기준치: | 45/22/9 |
굴림: | 83 |
판정결과: | 실패 |
새롭다는 인상이 강하군요.
검게 칠해진 지붕에 엷은 커피색 아치 모양 출입구를 통해 들어가면 붉고 소박한 지붕의 낮은 건물들과 우거진 녹음이 눈에 들어옵니다.
맥주를 빚는 양조장이 있지만 늦은 시간이라 체험은 어렵겠죠.
그런데 이건 무슨 일일까요,
낮은 지붕의 처마가 무언가의 무게로 살짝 기울어진 듯 싶더니,
폭설 다음날 떨어지는 눈더미처럼 생크림과 사탕, 젤리가 거리에 와르르 쏟아집니다.
길에 틈틈이 난 하수구들은 이미 크림으로 넘쳐흐르고 있습니다.
다가가면 가죽 장정된 책 두 권에 의해 육중한 양문이 열리고,
책들이 날갯짓하듯 책장을 팔랑대며 두 사람을 내부로 안내합니다.

안으로 들어오라는 것 같지?



(슬그머니 손 놓는다.)
혼자 걸을 수 있지.

그래. 건강한 신체의 소유자야. (다리 흔들거린다⋯)

책들을 따라 도서관 2층으로 올라가면 샹들리에가 장식된 내부와 장서가 있는 철학의 방으로 이어지는 연결 통로가 나타납니다.
폐장된 상태이므로 내부는 컴컴하지만 벽을 뚫고 은방울꽃들이 자라나며 봉오리에서 피어난 수많은 반딧불이가 안으로 밀려 들어가 은은한 조명을 제공합니다.

(흘끔 본다. 눈길 한 번 주고 멋대로 발걸음 옮긴다⋯ 또 빤히 바라보기만 할 것 같아서.)
철학의 방 안에는 수많은 고서가 소장되어 있으며 천장에 금색과 하늘색을 주색으로 하는 웅장하고 사실적인 프레스코화가 그려져 있습니다.
대부분의 자료가 체코어나 라틴어, 그리스어로 적혀 있기는 하나 원한다면 책들을 마음껏 꺼내어 읽어볼 수 있습니다.
수도원이 제대로 개장되어 있는 낮에는 할 수 없는 경험이네요.

기준치: | 60/30/12 |
굴림: | 13 |
판정결과: | 어려운 성공 |
빼곡히 나열된 몇만 권의 책들 가운데 한 권을 홀린 듯이 뽑아듭니다.
책장을 넘기면 페이지들이 누렇게 바랜 것도 모자라 갈색 부스러기들이 종잇장 사이에서 우수수 떨어져 내립니다.


알아보기 힘든 옛 언어로 쓰였지만 이상하게도 글자 하나하나가 눈에 새겨지듯 읽힙니다.
편지 앞부분의 수신인 이름은 번져서 제대로 읽기 어렵습니다.

기준치: | 45/22/9 |
굴림: | 22 |
판정결과: | 어려운 성공 |
편지에 적힌 서명이 '애쉬'라고 쓰인 것 같다는 느낌이 듭니다.
조각상이 스스로를 소개한 이름과 똑같게 느껴지는 것은 기이한 우연일까요.
편지를 바라보고 있으면 잉크가 부글부글 끓습니다.
검은 잉크가 누런 종이에서 미끄러져 추락합니다.

(눈 비비적⋯)
(종이 냅다 보여준다.) 너, 이거 보여? (글씨를 가리키며⋯)


그러던 와중,
팔락거리는 책들 사이로 새하얀 물체가 보입니다.
저건⋯ 정말 새인가요?


기준치: | 65/32/13 |
굴림: | 83 |
판정결과: | 실패 |
무슨 새인지는 모르겠어요.





바보 취급이나 하고.



문득 어디선가 인기척이 느껴집니다.
이상하군요.
이런 곳에 사람이 있을리가⋯.
생각한 순간,
우리는 도서관이 아닌 밤의 도시에 돌아왔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기준치: | 50/25/10 |
굴림: | 71 |
판정결과: | 실패 |
아무리 밤이라고 하지만⋯. 거리에 사람들이 이상할 정도로 보이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그 시선은 누구의 것이었던 건가요?

기준치: | 50/25/10 |
굴림: | 8 |
판정결과: | 극단적 성공 |
전구 대신 축구공만 한 항성 조각이 불타고 있는 가로등 뒤로 황급히 사라지는 그림자를 목격합니다.
잠시후⋯
사제복을 입은 한 남자가 달려듭니다!
그는 '애쉬'를 향해 주방 식칼을 힘껏 던집니다.
대리석과 철이 부딪히는 소리가 울리고,
칼은 애쉬의 가슴에 약간의 흠집을 남긴 뒤 살짝 휜 채 바닥으로 떨어집니다.
???: 하얀 사람이 프라하를 멸망시킬 거라 했어!
당신, 하얀 사람이지?
⋯.라는, 불안 가득한 고함을 내지르면서 그는 다시 칼을 집어듭니다.




(⋯.푸핫.)

???: 이, 익⋯. 그게 아니라!!! 한 예언이 있었다고.
오래전 프라하에
악마
가 나타난 일이 있었어. 사람들이 그를 봉인했지만 먼 훗날 하얀 사람이 도시에 나타나면 세상이 뒤틀리며 악마가 복수를 위해 돌아와 도시를 멸망시킬 거라는 말이야.당신도 느끼지 않았어? 저 사람이 움직이기 시작하면서 세계에 기현상이 생겨나는 것을!

내가 미치지 않았다는 거고. (외려 안심했다. 방긋!)


기준치: | 5/2/1 |
굴림: | 61 |
판정결과: | 실패 |
(맹⋯)
악마론이나 종교 전쟁은 당신의 관심분야가 아닙니다.
???: ⋯나, 나중에 후회나 하지 마! (도망간다.)
⋯거리에는 스산한 침묵이 맴돕니다.
그리고 얼마 가지 않아 건물과 조형물들의 벽에서 움찔거리며 수포가 차오르기 시작합니다.
갈라지는 벽돌과 시멘트 사이로 종양처럼 더 작은 벽돌들이 튀어나와 번져 나가고,
그중 일부가 굉음과 함께 터지며 사방으로 석고 가루가 하얗게 흩뿌려집니다.




1870년에 만들어진 이 묘지는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성당 사이에 위치하고 있으며,
문인이나 화가 등 체코의 중요한 예술가들 거의 대부분이 이곳에 잠들어 있다고 합니다.
비셰흐라드로 진입하면 수프 캔처럼 둥근 로마네스크 건물인 성 마틴 교회를 지나 성당들 사이로 걸어 들어갑니다.
묘지 입구에서는 유명인의 이름과 매장 위치가 적혀 있는 안내도를 볼 수 있습니다.


매끈한 돌로 만든 비석은 각 인물에 걸맞게 얼굴이나 상징물이 조각되어 있고,
눈에 띄는 금빛 글씨체로 이름이 새겨져 있습니다.
간혹 묘비 아래쪽에 헌화를 할 수 있는 공간이 있기도 합니다.


처음 들어봐?

이거 무슨 꽃인지 알아? (화제를 돌린다.)
그는 어느 묘지에 놓인 작은 들꽃 다발을 가리킵니다.
저 꽃은⋯.

기준치: | 65/32/13 |
굴림: | 99 |
판정결과: | 실패 |
모르겠습니다⋯.

이건.
그러니까,


이름 없는 들꽃이야.



믿는 눈치네요⋯.

(죄를 짓는 기분이 든다.)
석고상인걸요, 뭘.
묘지를 거닐다보면 문득 익숙한 이름이 하나 더 눈에 들어옵니다.
글로디스⋯ 마셜?
아니, 정확히는 그것은 자신의 이름이 아닌 낯선 체코 글자입니다.
하지만 어쩐지 정말 자신의 이름이었던 것마냥 친숙하게 느껴집니다.

체코어 읽을 줄 아나?

꺼림칙한 느낌을 억누르고 좀더 자세히 들여다보려 할 때,
문득 풍경이 이지러지며 글자는 다른 이름으로 바뀌어 있습니다.
착각이었을까요?

오늘 눈이 좀 안 좋은 것 같기도 하고.

(손 뻗어서 손등으로 오른쪽 눈 가린다.) 이러면 아무것도 안 보여?



좌안 우안이 담는 게 서로 묘하게 다르거든.
영영 사물의 제대로 된 상은 못 담으려니 해. (주변을 슥 둘러본다.) 편향된 시선으로 사는 것도 나쁘진 않아서.

그래서 피해만 주는 게 아니라면 괜찮지 않으려나. (눈동자가 굴러간다.) 사람은 언제나 본인이 보는 것만 믿으려고 드니까⋯ 보이지 않는 걸 실재 삼아 사는 건 소수지. 너는 날 지금 뭐로 보고 있는데?

글쎄. 그런 걸 이제 막 만난 인간에게 물어봐야. (애쉬를 훑어본다.) 움직이는 조각상?

밤이 깊어지고, 이제 도시에는 사람 그림자도 보이지 않는 것이 익숙해졌을 무렵입니다.
사제복을 한 광인을 만난 이후로는 사실상 누구도 만나지 못했으므로,
어쩌면 이 도시에는 둘뿐만 살아 움직이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고 느껴질 정도입니다.
그때 잔뜩 기괴해진 풍경 사이로 사람 한 명이 비틀거리며 걸어오는 모습이 보입니다.
그가 충분히 가까워지고 나면 눈이 풀려 몽롱하고 초점이 맞지 않으며,
비척거리는 걸음새가 매우 기계적이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취객인가?
혹은 마약 중독자일지도 모르겠어요.
그러나 그는 다리가 풀리지도 방향을 잃지도 않은 채 한 곳으로만 꾸준히 걸어가고 있습니다.

그에게 관심을 잃든 그를 따라가 보려고 하든 관계없이,
잠시 후 또 다른 사람 한 명이 아까 본 인물과 같은 방향으로 걸어가고 있는 모습을 다시 목격하게 됩니다.
이번에는 상당히 말쑥하게 차려입었고, 머리도 깔끔하게 빗어넘긴 사람입니다.
그는 아까의 인물과 전혀 다를 바 없는 비틀거리는 걸음새로 시체처럼 부지런히 움직이고 있습니다.
이상하지 않나요?

가볼까.

따라가기로 결정한다면 움직이는 이들의 대열에 온갖 종류의 사람이 점점 합류하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모두들 어딘가에 조종당하는 것처럼 얼이 나가 있습니다.
기이한 행렬은 차츰 모여들어서, 놀이공원의 퍼레이드라도 하듯 일제히 발 맞춰 걸음을 옮깁니다.
그들이 카를 다리를 건너 어디론가 향하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연필꽂이에 빽빽하게 꽂힌 연필을 보고 있는 것처럼 기분이 이상합니다.
다리 이편에서 저편까지, 발 디딜 틈 없을 만큼 빼곡한 유령 같은 인간들이 길을 온통 메우고 있습니다.

기준치: | 44/22/8 |
굴림: | 27 |
판정결과: | 보통 성공 |
이성 1 차감합니다.
행렬에 속한 인간들 전원이 같은 말을 노래하듯 중얼거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 나는 또 새 하늘과 새 땅을 보았습니다. 첫 번째 하늘과 첫 번째 땅은 사라지고 바다도 더 이상 없었습니다⋯.

기준치: | 65/32/13 |
굴림: | 76 |
판정결과: | 실패 |
어디서 들어본 소절인 것 같기도 하고⋯.
조금 더 들어볼까요.

기준치: | 55/27/11 |
굴림: | 47 |
판정결과: | 보통 성공 |
: 보라, 신의 거처는 이곳 프라하에 있다. 신이 꾸시는 꿈은 우리의 현실이고 신의 송곳니 우리를 꿰뚫을 것이요 신의 이빨이 우리와 남김없이 씹어 삼킬 것이다. 신이 우리와 함께 기거하시니 우리는 신의 완구가 될 것이요 신의 양식이 될 것이다!
감미롭고 단조로운 사람들의 목소리는 화음을 이루며 울립니다.

기준치: | 45/22/9 |
굴림: | 1 |
판정결과: | 대성공 |
(음. 워크샵에서 비슷한 광경을 봤던 것 같기도.)
모든 것이 꺼림칙하고 기괴하지만 어쩐지 아름다운 음률이라는 생각이 잠깐 듭니다.
그때 당신의 손을 잡아끄는 손길이 있습니다.
애쉬입니다.
원래도 돌처럼 창백하고 핏기 없는 얼굴이었지만, 착각이 아니라면 더욱 새하얗게 질린 것 같습니다.


어디로?

그는 당신의 손을 잡고 재빨리 행렬의 반대 방향으로 달립니다.

두 사람은 행렬에서 벗어나,
금속과 철사, 클립과 자석 같은 것들이 관상용 묘목 대신 피어나 있는 어느 정원에서 멈춰 숨을 돌립니다.

너, 내가 그냥 움직이는 조각상이라고 했나?
그렇다면 나는 왜 살아 움직이고 있는 걸까?

너를, 음, 봉인한 인간이 있었는데⋯ 뭐. 내가 하필 그걸 깨워버렸다든가.
(판타지에는 자신이 없다. 인상이 구겨진다.)

프라하에서 아주 심상찮은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만은 확실합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의 시작이 바로 글로디스 당신 곁에 있는 애쉬였다는 것 또한.
분명 마법에 의해 움직이고 있던 것들 대부분은 풍경이나 소품에 가까웠죠.
지성이 없는 사물이 지성체가 되는 일은 전무합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애쉬에게서 느껴지는 출처불명의 기시감,
낯선 친숙함⋯
마치 오래전부터 알고 지냈던 사이 같은 이 기묘한 분위기와 운명적인 끌림 역시도 설명이 필요합니다.
단서를 얻기 위해 더 둘러보는 것이 좋을까요.

돌아다닐 수 있겠어?

넌 뭐 꺼림칙하지도 않아? (흘긋)

뭐⋯⋯.
죽기보다야 더 하겠어.


믿음직하다면야? (프라하 성으로 가볼까⋯)

앞장 서. ⋯아니다, 나란히 걷자.

잘 따라나 와, 어디쯤에서 걷든 신경 안 쓸 테니까⋯

길이 약 570미터, 폭은 약 130미터에 달하는 대규모의 고성으로 기네스북에도 등재되어 있습니다.
프라하 여행에서 반드시 방문해야 하는 관광 명소로 꼽힙니다.
매우 넓은 성채 단지로 입장할 수만 있다면 이곳을 둘러보는 데만도 반나절이 꼬박 걸릴 것 같습니다.
그러나 두 사람이 고생해서 성 단지의 입구로 다가가면 쇠사슬, 털실, 리본, 끈끈이, 줄줄이 꿴 구슬,
길다란 은빛 뱀 등의 상상할 수 있는 온갖 잡동사니가 입구의 양옆을 고정하고 있어서 그것을 헤치고 내부로 들어가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합니다.
바깥에서 구경하는 것으로 만족해야겠네요.


애쉬는 대답이 없습니다.
돌아보면 그는 마치 선 채로 꿈을 꾸는 것처럼 눈을 감고 제자리에 붙박여 있습니다.

애쉬?
(손바닥을 펴서 눈앞에 흔들거린다.)
반응이 없습니다.
흔들어 깨워 볼까요?

한참 후에야 그의 동그란 눈동자가 당신을 돌아봅니다.

꿈이었나? 너무 생생했는데⋯

무슨 시체. 누구 거였는데.

이어서 꾸면 알아차릴지도. (눈을 도로 감는다.)

(다시 짤짤 흔든다.) 그냥 가자. 잠 깨는 게 낫겠다⋯

어디로 갈 건데?

발트슈타인 궁전은 보헤미아의 30년 전쟁 당시 가톨릭측에서 전공을 올려 권력을 확장한 발렌슈타인 백작의 야심이 담긴 건축물로,
바로크 양식을 활용하여 프라하 성을 능가하는 화려한 거처를 목표로 지어졌지만 백작이 이른 나이에 암살당하는 바람에 실제로 기거한 세월은 길지 않다고 합니다.
궁전 내부는 입장 종료 상태이지만 정원으로 통하는 문은 열려 있습니다.
밤이 드리워 어둑해진 상태에서도 우거진 녹음과 투명한 호수,
공중에 산란해 무지개를 뿜어내는 분수대의 윤곽은 아름답기만 합니다.
호수를 따라 정원 내부로 더 깊이 들어가면 각을 맞춰 전정한 녹색 덤불들이 미로를 이루고,
그리스 로마 신화에 나오는 청동 조각상들이 높은 받침대에 장식되어 있습니다.
정원의 한쪽 면에는 회색으로 울퉁불퉁하게 깎여 늘어져 있는 돌벽이 보이는데,
어둠 속에 잠겨 드문드문 드러나는 잿빛 실루엣이 조금 섬뜩한 분위기를 자아냅니다.
가까이 다가가면 그것이 인공 종유석 벽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석화된 포도 넝쿨처럼 드리워진 종유석들 사이에는 형체를 분간하기 어려운 돌덩어리 하나가 끼어 있는데,
원래부터 벽의 일부는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진지한 모습에 약간 넘어갔다.)




(돌덩어리에 다가가서 툭툭 건드리고 이런저런⋯ 행동을 해본다. 용기가 가상하다.)
돌을 건드리면 바닥으로 굴러떨어집니다.
그것은 홈이 나 있는 네모난 받침에 샤워헤드가 붙어 있는 것처럼 보이는 투박한 조각품처럼 보입니다.

거기, 바닥에. 써있어.

애쉬가 가리킨 손끝을 따라가면, 정말 조각품의 바닥면에 글씨가 쓰여 있는 걸 발견할 수 있습니다.
체코어로 되어있군요.



재밌는 일 생각이라도 났나 봐.
조각품은⋯. 그냥 조각품입니다.

대답을 하려는 순간,
회백색 구름이 가득한 먼 서녘 하늘을 배경으로 희끄무레한 형체가 보입니다.
눈을 가늘게 뜨고서 보면 그 정체는 아까부터 하늘을 맴돌던 이름 모를 흰 새입니다.
이윽고 낮게 비행하며 가까이 다가온 그것이 날개를 펄럭이자, 깃털 사이로 하얀 잿가루 같은 것이 후두둑 떨어집니다.
그와 동시에 근처에 주차되어 있던 자동차들의 문이 열리며 크고 갸름한 타원형의 알들이 굴러나오기 시작합니다.
알의 표면에 금이 가면 피처럼 붉은 액체가 솟구치고,
땅에 닿아 걸쭉하게 굳은 액체에 섞여 석류 알과 나사못이 비어져 나옵니다.


이어 하늘 위로 높이 날아오른 새가 또 다시 세찬 날갯짓을 하고 하얀 잿가루가 떨어지면 이번에는 도로 위에 올리브빛 모래사막들이 생겨나며,
시선을 거꾸로 하고 모래시계를 보는 것처럼 모래알들이 하나둘 머리 위로 솟아오르는 풍경이 보입니다.
저것입니다.
가는 곳마다 눈에 비쳤던 기이한 환상들은 전부 저 새가 부린 주술로 인해 만들어진 것이었습니다.
조금 후 새는 인도 위에 내려앉아 날개를 접고 꽁지 깃을 아래로 밀어넣으며 몸을 빳빳이 세웁니다.
그러자 새의 형상이 울컥울컥 모양새를 바꾸고, 그 대신 나타나는 것은
새하얀 인간
의 형체입니다. 문득 머릿속으로 사제복을 입은 자의 외침이 스쳐 지나갑니다.
하얀 사람이 프라하를 멸망시킬 거라 했어!"
저자가 바로 하얀 사람이구나.
이목구비나 팔다리의 모양, 의복의 종류도 분간할 수 없고,
단지 사람처럼 보인다는 막연한 느낌 외에는 모든 것이 초점이 맞지 않는 듯 흐릿하게 보이는데도.
그냥 어째서인지 그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기준치: | 43/21/8 |
굴림: | 27 |
판정결과: | 보통 성공 |
이성 변동 없습니다.
그것은 빠른 속도로 걸어나가 시야에서 사라져 버립니다.
그것이 남기는 발자국마다 하얀 잿가루가 묻어나며 기현상이 피어오릅니다.
그러나 도로에서 반짝이는 하얀 잿가루는,
하늘을 날던 새가 뿌린 것과 달리 일정한 간격을 두고 이어져 있어서 어렵지 않게 뒤쫓을 수 있습니다.



흔적을 한참이나 따라가다 보면 난데없이 길이 끊깁니다.
어디로 가야 할지 당황하고 있을 때,
문득 애쉬의 브로치에서 반짝이는 빛이 흘러나옵니다.
흐릿한 빛무리는 두 사람을 안내해주듯 주변을 천천히 맴돌며 앞으로 나아갑니다.
하얀 잿가루가 이어진 끝에는 난데없이 검고 깊은 구멍이 보입니다.
도시 한복판인데도 개의치 않는 듯 으깨진 아스팔트 사이로 아가리를 벌린 구멍의 모습은 기이하게 느껴집니다.
그리고, 사람 한 명이 들어갈 만한 크기의 구멍 아래쪽으로부터 흐릿하게 반짝이는 빛이 뿜어져 나오고 있습니다.
빛의 진원지는 무엇인지 알 수 없지만 섬뜩한 풍경과는 상반되게도 어쩐지 오랫동안 잃어버린 추억처럼 그리운 기분이 듭니다.

(고개 돌려 바라본다. 가겠냐는 듯.)

뛰어들어서 죽어버리면 어떻게 할 거야.



혼자 죽는 건 좀⋯. 외롭잖아. (이런 소리를.)

혼자 죽고 싶지는 않다, 생각해보니까⋯⋯.
숨이 끊어질 때엔 좀 반듯하게 인사도 받고 싶다고 해야 하나. (웃음소리가 숨에 섞여 흩어진다.) 같이 갈래? 너한테도 혼이 있는 상태라면야.

망설이지 마세요, 당신은 탐사자니까요!


(곧 발이 땅에서 떨어지면 손에 힘이 들어간다.)
더이상 내 몸을 지탱하는 것이 없다는 감각은 결코 편하지만은 않습니다.
마주잡은 손에 힘이 실립니다.

기준치: | 45/22/9 |
굴림: | 96 |
판정결과: | 대실패 |

기준치: | 30/15/6 |
굴림: | 59 |
판정결과: | 실패 |
바닥에서 몇 바퀴를 구릅니다.
글로디스 체력 -2, 애쉬 -1
그럼에도 여전히 손은 잡은 채⋯.
그가 웃습니다.
바깥에서는 칠흑같이 검기만 했지만 아래로 내려가자 빛이 강해져서인지 의외로 밝군요.
주변을 감싸고 도는 은은한 빛 때문에 시야를 확보하기는 어렵지 않습니다.
깊은 구멍 아래에도 하얀 잿가루가 여기저기에 번져 있으며,
누군가의 뼛조각과 원래 무엇이었는지 알 수 없는 썩은 잔해들이 흩어져 있습니다.

보는 것만으로도 오싹 소름이 끼쳐 옵니다.
마치 자기 자신의 죽음을 보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본능적인 불안이 등줄기를 타고 흐릅니다.

기준치: | 43/21/8 |
굴림: | 73 |
판정결과: | 실패 |
이성 1 차감합니다.


가장 빛이 밝은 위치를 찾아 확인하면 검은 흙 속에 반쯤 파묻혀 있는 무엇인가가 보입니다.

반짝이는 녹색빛 브로치입니다.
그건 애쉬의 가슴에 달려 있는 것과 생김새가 똑같습니다.



달아줘봐, 언제 조각상이 이런 걸 손수 달아주겠어.

순간, 당신의 시야가 하얗게 흐려집니다.
눈을 뜨면 애쉬가 밝게 웃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더 이상 돌처럼 단단한 회백색의 피부를 지니고 있지 않습니다.
뺨은 붉은 혈색을 띠고, 눈동자는 영롱한 녹색 빛깔로 반짝거리며,
입고 있는 의상은 부드러운 질감으로 만들어져 펄럭입니다.
그는 애쉬입니다.
이제 애쉬라는 이름은 너무나도 익숙하고 각별하게만 여겨집니다.
섬세한 살굿빛 손가락들이 당신의 목에서 떨어지며 그가 뒤로 한 걸음 물러섭니다.
가슴에서는 같은 모양의 금빛 브로치가 달랑거립니다.
나른하게 떨어지는 햇빛, 보글 거리는 소리, 박하향.
황금빛 태양이 네 미소와 잘 어울린다며 웃음 짓는 것은,
시계탑 아래에서 영원을 기약했던,
구시가지 광장을 함께 거닐었던,
석상 하나 없는 카를 교 아래로 흐르는 블타바 강을 함께 바라봤던 그 사람.
페트르진 언덕에 손을 맞잡고 누워 별을 보았고,
격렬해지는 전쟁 속에서 귓전을 울리는 비명소리를 피해 비셰흐라드로 도망쳐 숨을 죽였고,
섬뜩한 코끼리 울음이 고막을 찢는 순간 부둥켜안은 몸을 가까이 끌어당겼고,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반드시 서로를 구해줄 거라 다짐했던, 하지만 영영 그러지 못했던⋯
언젠가 당신은 그를 사랑했습니다.
지난 생에서 건져올려진 아주 머나먼 옛 기억.
그것은 1XXX년, 새하얀 눈이 내리던 겨울의 일이었습니다.
각자가 믿는 가치를 비호하기 위해 기꺼이 전장에 나섰던 수많은 이들.
전쟁이 보헤미아 왕국을 휩쓸었고 그 한가운데서 두 사람은 눈먼 혐오나 증오 같은 것보다 몇 배는 무시무시한 운명에 직면했습니다.
악마의 도래를.
전쟁통에 어느 불경한 이단들이 기어코 세상에 악마를 불러왔고,
섬광처럼 뇌리를 헤집는 기억 속에서 당신은 악마에게 사로잡힌 그의 모습을 봅니다.
그것을 떨쳐내기 위해 부단히 애썼음에도 모든 발버둥은 헛된 것이었고,
먹구름이 드리운 프라하 성 아래서 애쉬 어두운 목소리로 입을 뗐습니다.

계시 같은 꿈들을 꿨어. 언젠가 그것의 수하인이 깨어나게 될 거야. 더 이상 세계는 안전하지 않을 거야. 혼자라도 이곳을 떠나, 숨어, 그리고 우리⋯.
그 사람이 말합니다.
하지만 예언이란 실현되지 않을 수도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은빛 날이 반짝이는 검을 한 손으로 그러쥡니다.
자신이 먼저 그 수하인을 찾아내는 상상을 합니다.
날붙이를 그자의 심장에 내리꽂는 상상. 위험한 결심입니다.
몸을 감쌀 갑옷 하나 없이 얼어붙은 밤거리를 질주합니다.
시체가 널린 도심 속에서,
이토록 처참하게 무너진 풍경 속에서,
한 줄기의 희망이라도 찾을 수 있다면.
적막한 세계 속에 쿵, 쿵, 섬뜩한 발소리만이 울려 퍼져도⋯
발걸음을 멈춥니다.
말로 형언하기 어려운 미지와 공포의 존재.
보는 것만으로도 눈이 멀 것 같은,
압도적으로 거대한 코끼리 신이 피에 굶주린 눈동자로 내려다보고 있습니다.
시야가 혈흔으로 가득 메워진 채 암전.
다시 눈을 뜨면 브로치를 매달기 전에 있던 장소입니다.
온 몸이 땀으로 젖어 있습니다.

다정한 물음.
그건 당신이 기억하는 그 목소리 그대로인가요?

용기가 더 있었다면 좋았을걸.

그래도 부족하다고 느껴진다면, 자. (회색빛 손바닥을 내민다.) 손이라도 맞잡고 있자.

차가운 손이 살갗에 닿으면,
어렴풋이 짐작합니다.
이 모든 기현상이 도시에 흐르고 있는 마법 때문이라면,
마법이 사라지고 나면 그또한 조각상으로 되돌아가고 마는 것을.
어깨 너머 저 멀리서 스쳐 지나가는 새하얀 형체를 봅니다.
상당히 거리가 있는 것 같은데,
원근이 무색하게도 그것은 애쉬보다 별로 작아 보이지 않습니다.
저것이 그 사이에 더욱 거대해진 걸까요?
직감적으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느낍니다.
하얀 시종이 태어난 구덩이가 아가리를 벌리고 두 사람을 빨아들이려 하고 있습니다.

기준치: | 45/22/9 |
굴림: | 9 |
판정결과: | 극단적 성공 |

아직 인사할 때는 아닌 모양이지.

이제 막, (⋯) 생각난 사람한테.


(직후 그는 고개를 숙였다.)
참을 수 없이 분하네.
나도 보고 싶었어, 애쉬.




이번엔 해내야 할 텐데.
(칼을 받아든다. 표정이 썩 밝진 않았다.)
손을 대면 신기하게도 녹이 허물을 벗듯 스르르 벗겨지며 순백색의 손잡이와 날카로운 은빛 날을 되찾습니다.



울음소리가 들립니다.
저 방향은⋯.
성 비투스 대성당입니다.

(왜 이리 대단한 일들을 내 손에 쥐여주는 건지. 그쪽으로 향해 떨어지는 발걸음이 무겁다.)
르네상스 양식의 고급스러운 건물들이 줄을 지은 완만한 오르막길, 네루도바 거리를 지나⋯.
흐라드차니 광장을 가로지릅니다.
곤봉과 칼을 든 무사, 황금 왕관을 쓴 사자와 독수리 등의 동상,
돌로 된 입구가 달린 마티아스 성문,
그리고 프라하 성의 하이라이트라고 하는 성 비투스 대성당⋯.
안으로 들어서면 끔찍할 정도로 무시무시한 광경과 마주합니다.
성당의 아름다운 장식과 매우 이질적인, 기괴하고도 혐오스러운 생물체를 조각한 석상이 성당 한가운데에 장식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당연하지만 미동도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어쩐지 그것이 단지 잠든 것뿐이라는, 당장이라도 눈을 뜰 것 같다는 소름 끼치는 예감이 듭니다.

기준치: | 42/21/8 |
굴림: | 26 |
판정결과: | 보통 성공 |
이성 변동 없습니다.
그것, 그 모독적인 조각상의 뒤에는 아까 보았던 유령 같은 인간들의 긴 행렬이 빼곡하게 줄지어 늘어서 있습니다.
왕 앞에 도열한 신하 무리를 보는 것 같아요.
그들은 모두 꿈꾸듯 눈을 감고 있으며, 입가에는 은은하고 몽롱한 미소가 감돕니다.
흰 새가 변신하는 모습을 보았을 때보다 훨씬 몸짓을 부풀린 하얀 시종은 조각상의 주변으로 계속해서 잿가루를 뿌리며,
이제는 어떤 물체를 형상화한 것인지 알아보기도 어려울 만큼 기괴한 환상을 피워내고 있습니다.
지금이라면 할 수 있어요.
저 거대한 몸체에 검을 찔러넣는 거예요.
Adiós, hijo de puta.
(망설임이 없다. 군더더기도 없어야 할 터인데.)
귀청을 찢는 끔찍한 비명 소리가 울립니다.
그 소리는 바깥에서 들리는 것이 아니라 체내 깊은 곳으로부터 비집고 올라와 온몸을 구석구석 휘감으며 찢는 파동처럼 느껴집니다.
마지막 단말마를 남기고 하얀 시종은 거품처럼 터져 버립니다.
이윽고 유리가 산산이 깨지듯 환상을 품은 세계 전체가 느리게 부서지기 시작합니다.
새벽이 영원히 계속될 것만 같았는데,
깨져 가는 세계 너머로는 어느새 동이 트는 모습이 보입니다.
코끼리 조각상 역시 사막의 신기루가 한달음에 사라지듯 서서히 녹아내립니다.
신이 사라지자 유령처럼 그 뒤를 지키던 사람들도 목적을 잃은 듯 일제히 성당을 나가 뿔뿔이 흩어집니다.


⋯⋯.
그래.
긴 밤 동안 있었던 모든 일들이 한낱 꿈이었던 양 느껴집니다.
그래요.
이제 아침이 오고 있습니다.
동녘에서 떠오르는 태양이 하늘 아래쪽을 옅은 황금빛으로 물들입니다.
하늘을 유영하는 분홍빛 해파리들도,
보도블럭을 뚫고 자라난 석영도 사라지고 별들도 더 이상 춤추지 않습니다.
눈을 뜨려던 신은 다시 기약 없는 잠 속을 헤매기 시작하고 프라하는 마침내 꿈에서 깨어납니다.
모든 기현상들은 빠르게 닳아 없어지고 있습니다.
'그'도 예외는 아닙니다.
이제 말을 건네는 입술은 점점 느리고 힘없이 움직여서, 목소리는 희미한 속삭임처럼만 들립니다.
맞닿은 살결이 얼음장처럼 차갑고 딱딱하게만 느껴집니다.


우리는 다시 프라하를 걷습니다.
천문시계의 인형극,
아담과 이브의 조각상,
스비치코바와 돼지고기 너클, 생맥주⋯.
어느 예술인의 무덤.
그리고 구시가지 광장⋯.
함께 하지 못해 누군가의 미련이 되었던 이 거리를.
지금은 함께 합니다.



옛 연인이라 신경 안 쓰겠다는 거지⋯.

신경쓰면 모레쯤 되는 날에 폭사할 것 같거든.

이번 생도, 다음 생도.
그러니까, 다음에 또 보자.

생마다 다른 방식으로.
다음에도 나를 잘 일깨워야 돼.
다시 조각상이 되는 것은 아마도 죽음과 비슷할 것입니다.
아무것도 의식하거나 기억할 수 없고,
영원히 잠드는 것처럼 몸이 무거워집니다.
끈질기게 이 도시와 자신에게 들러붙어 있던 괴물이 다시는 돌아오지 않으리란 것을 알았기 때문일까요.
그는 아파하지도, 슬퍼하지도 않습니다.
차가운 돌이 되어 풍경에 녹아드는 애쉬의 입가에는 미소가 번져 있습니다.
처음 이곳에 도착했던 저녁과는 많은 것이 달라졌습니다만,
그 사실을 증명하는 것은 행복한 듯 슬쩍 웃고 있는 애쉬의 입꼬리뿐입니다.
⋯⋯
어쩐지 지나치게 묵직하고 달콤하게 느껴졌던 새벽 공기는 아침 해가 떠오른 뒤로 흩어져 버렸습니다.
꿈이 걷힌 뒤에 도시는 평소처럼 하루를 시작하는 사람들의 움직임으로 분주해집니다.
어젯밤의 일에서는 도무지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습니다.
이제 모든 위협이 사라졌지만,
이 거리를 떠돌던 마법 역시도 그렇게 찰나처럼 도망쳐 버렸습니다.
잠이 모자라네요.
당연한 일입니다.
지난밤에는 한숨도 눈을 붙일 겨를이 없었으니까요.
카를 다리를 건너 숙소로 돌아갑니다.
저 강 너머에는 살아 있는 사람을 돌 속에 가두어 둔 것마냥 유난히 생생하게 멈춰 있는 석상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단지 착각에 불과합니다.
만져 보아도 손끝에 느껴지는 감촉은 단단하고 차가우며,
이름을 불러 보아도 돌아오는 대답은 없을 것입니다.
숙소에서 짧게 눈을 붙인 뒤 원래 계획했던 대로 천문시계 앞 카페에서 늦은 브런치를 먹습니다.
문득 몰려든 인파에 샌드위치에서 고개를 들어 보면 시계의 시침은 열두 시에 바짝 가까워진 상태입니다.
이윽고,
하며 시계소리가 울리고,
정교한 12사도의 모형이 순차적으로 빙글빙글 돌며 정오를 알립니다.
북적거리는 사람들 사이에서 박수와 환호 소리가 울리고 여기저기에서 셔터를 찰칵찰칵 눌러 대는 이들이 보입니다.
그때 누군가가 어깨를 톡톡 건드립니다.
묘한 기분에 휩싸여 눈을 들어 보면 어쩐지 굉장히 익숙한 얼굴입니다.
어젯밤 내내 당신이 들여다보았던 바로 그 얼굴입니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애쉬가 돌아온 것은 아닙니다.
현대적인 차림새에 어깨에 걸친 커다란 배낭, 목걸이 대신 가슴 아래쪽에서 덜렁거리는 카메라로 보아 상대는 영락없는 관광객입니다.
그러니까 아마도 그냥 지독히도 닮은 사람이겠죠.
시계가 다시 잠잠해지고 몰려들었던 인파가 걷힐 무렵,
그 사람은 공손하게 인사를 건네고는 커다란 여행용 지도를 당신의 눈앞에 들이밉니다.

제가 프라하에 처음이라서⋯
그 사람이 묻습니다.
마침 그곳이라면 당신이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