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로메 V. 헬레니아:(새하얀 국화 꽃다발이라니, 이런 걸 들고 있다면 꼭... 장례식이라도 가는 것 같지 않나. 고개 슬 기울였고,)
듣기
기준치:
70/35/14
굴림:
36
판정결과:
보통 성공
바닥에 나뒹구는 꽃다발을 주워들던 그 순간,
단말마와 같은 이명이 짤막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갑니다.
마치 틴벨과 같은 소리였습니다.
아,
그제야 흐릿한 의식 너머로 떠오르는 기억이 하나.
그렇지.
오늘은 루보르의 첫 번째 기일이었죠.
그러니 당신은 루보르가 잠들어있는 납골당으로 향하는 길이었을 겁니다.
아무리 피곤해도 그렇지,
이런 사실을 잊고 있었다니.
당신답지 않네요.
살로메 V. 헬레니아:(이명이 사라지고 그 자리를 메우듯 떠오른 기억에, 꽃다발을 주워 안은 채 가만히 굳은 손이 작게 떨려오는 것을 애써 참는다. 제 머리가 어떻게 된 것이 아닌가 싶어 애꿎은 입술만 짓이기듯 씹는 눈이 얼핏 물기에 젖은 것도 같았다.)
거기까지 떠올리면 문득 버스는 인적이 드문 정류장에 정차합니다.
탑승구가 열리고,
올라타는 승객의 모습에 당신은 스스로의 눈을 의심하게 됩니다.
그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야 버스 위에 올라탄 사람은,
...1년 전 죽었던 루보르였으니까요.
고즈넉한 빗소리가 귀를 먹먹히 울리는 텅 빈 버스 안,
죽었던 루보르와 조우하게 된 살로메 베라 헬레니아.
이성 확인합니다.
살로메 V. 헬레니아:...웃기네요, 이젠 하다하다 스스로의 망상을 현실에 겹칠 정도까지 되었나...
SAN Roll
기준치:
90/45/18
굴림:
30
판정결과:
어려운 성공
이성 -1
맞붙고,
멎습니다.
맞붙는 것은 허공 위로 겹쳐진 두 사람의 시선.
일 순 멎는 것은 당신의 호흡.
그뿐입니다.
당신은 알고 있습니다.
내가 살고 있는 현실은 때로 꿈보다 비현실적이라는 사실을요.
그렇기에 지금껏 비현실적인 현실을 여러 차례 맞이해가며
이토록 불친절하고 잔인한 삶을 살아오지 않았던가요.
비현실적인 현실이요.
루보르는 분명 1년 전에 죽었습니다.
오늘처럼 비가 내리던 날,
돌이킬 수 없는 사고에 휘말려서요.
그래요.
나는 그 사람이 죽음을 맞이하던 순간 곁에 있지 못했고,
그렇기에 그의 부재를 부정했던 기억을 떠올립니다.
그러니 내 앞에 서 있는 저 사람은,
루보르가 아닌, 그를 지나치게 닮은 사람일 겁니다.
꿈보다 비현실적인 현실의 나날 속에서도
실현될 수 없는 비현실이 있는 법입니다.
살로메 V. 헬레니아:(제 앞에 서있는 이를 보며 쓰게 웃는다. 죽은 사람이 다시금 살아돌아오는 일은 없으니, 아마 이건 지나치게 그를 닮은 이거나 제가 만들어낸 환영일 것이다. ...아니, 그래야만 했다. 혹여 정말, 정말로 돌아온 것이라면... 왜 이제서야, 약해질 대로 약해진 제 앞에 나타났냐는 투정과 함께 다시 한 번 비참해질테니.) ...왜, 자꾸.... ...
혼란 속에 빠져있는 당신의 상태를 눈치챈 걸까요.
막 버스에 올라탄 루보르를 닮은 이는 당신의 생각을 부정하듯
두 눈을 한번 깜박이고 당신이 앉아있는 좌석 옆에 앉습니다.
루보르 C. 베스페르티니:(처음보는 표정과 그의 얼굴에 실린 감정을 한 눈으로 읽어낸다. 그 모습에 잠깐 머뭇거렸을까, 빗소리가 적막한 버스를 가득 채울 때까지 기다렸다 느린 발걸음으로 네 옆에 다가가서 앉는다. 눈을 마주치지 않고 대답했다.) 안녕, 오랜만이야.
저 눈,
저 목소리,
저 얼굴.
아무리 부정하고 잊으려 애를 써도 잊히지 않는 것들이 있습니다.
그리웠고,
그리웠기에
나날이 새로운 처절함과 아픔을 느끼게 했었던 저 두 눈처럼요.
정차했던 버스는 오로지 두 사람만을 태운 채,
다시금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그 순간 당신은 받아들이고 맙니다.
루보르를 닮은 이는,
그저 닮은 사람일 뿐이 아닌
루보르 그 자체라는 사실을요.
…….
무어라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의 덩어리가 가슴속에 응어리로 자리 잡습니다.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 갈피조차 잡히지 않습니다.
혹여나 꿈에서라도 다시 만날까 준비해 두었던 말이 한가득 쌓여 있었는데도 말이에요.
루보르는 여전히 혼란스러워하는 당신과 눈을 마주합니다.
살로메 V. 헬레니아:... ...어째서, 왜 이제서야... (아, 그리웠던... 타오르는 노을과 밤의 장막을 담은 너의 두 눈을 마주하며 무너진다. 너무나도 늦지 않았던가. 남겨진 이는 떠난 이에 대한 기억이 시간에 녹아 흐려지고 또 그를 억지로나마 조각내어 맞추어 떠올릴 때마다 비참하고, 나약해진다. 사랑이란 본디 행복에 빠져 죽을 것 같다 하여도 이상하지 않을 것인데, 저는 언제나 스스로의 나약함에 고개 숙이기만 했다. 그리고, 지금도...)
루보르 C. 베스페르티니:(너는 늘 견고하게 빚어진 인형과 같았었다. 한 치의 빈틈을 용납하지 않아서, 저는 늘 그 구석을 찾아 집요하게 파고 들기도 했었다. 그렇지만 다시 만난 너는 금방이라도 바스라질 것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이런 순간을 기대해왔다고 생각했는데 어째서인지 마음이 마냥 편하지 않았다. 숙여진 네 머리를 한참동안 바라만 보고 있다가 낮은 목소리로, 조용히 묻는다.) 어딜 가는 중이었어?
살로메 V. 헬레니아:...납골당에 가고 있었어요. 오늘이, 당신의 기일이니까... (국화 꽃다발만 가만히 고쳐 안고는 고개를 들어 그제서야 너를 제대로 마주한다. 시야에 들어오는 것 중 그 무엇 하나도 네가 아닌 것이 없어서, 문득 목이 메이는 것을 들키기 싫어 다시금 입을 다문다. 이래서, 함부로 마음을 주어서는 안 되는 거였는데. 그래야만 했는데..)
당신의 답변을 들은 루보르는 어떤 대답에도 그저...
군더더기 없는….
이름 지을 수 없는 감정이 가득 담긴 눈으로 이쪽을 응시할 뿐입니다.
덜컹.
다시 한번 방지턱을 밟고 지나간 버스가 얕게 흔들립니다.
[관찰] 판정합니다.
살로메 V. 헬레니아:
관찰력
기준치:
85/42/17
굴림:
46
판정결과:
보통 성공
얕은 진동 탓에 시야가 갈라짐과 동시에,
문득 운전석 쪽으로 시선이 꽂힙니다.
...이상합니다.
운전석에서 운전대를 잡고 있어야 할 버스 기사가 보이지 않습니다.
이 버스는 그저 운전사도 없이 홀로 비가 내리는 도로를 내달리고 있습니다.
이성 확인합니다.
살로메 V. 헬레니아:
SAN Roll
기준치:
89/44/17
굴림:
77
판정결과:
보통 성공
(이상하게 느낄 법도 하지만, 네 시선을 눈에 담고는 그럴 겨를도 없이 주먹만 힘주어 쥔다.)
루보르 C. 베스페르티니:(빗물에 흠뻑 젖은 붉은 눈동자를 마주 바라본다. 그곳에는 처음보는 감정들이 담겨있었다.) 왜.... (이해하지 못해서 물었지만 끝맺지 못한다. 네 대답을 예상할 수 없었다. 네게서 시선을 돌려내고 허공을 바라보며 물었다.) 네가 향하는 그 납골당에 누워있어야 할 당사자가 이렇게 걸어서 네 곁에 왔는데. 묻고 싶은 게 있지 않아?
살로메 V. 헬레니아:(제대로 끝맺지 않은 물음에 속으로 대답을 삭힌다. 그래, 겪어보지 못했던 상실이 너무나도 아팠던 탓이다. 오로지 저 뿐이었던 세계에 자리잡은 네가 있었고, 곧 사라져 무엇으로도 메울 수 없는 균열이 생기고 말았으니. 다시 메워지는 일 없이 덧나고 바스라져 더욱 큰 흔적이 남았을 뿐이라고...) ...묻고 싶은 건 많죠. 그렇고 말고요. 어째서 멀쩡하게, 이제서야 이 곳에 왔는지. 아니라면 제가 꿈이라도 꾸는 건지...
루보르 C. 베스페르티니:그렇지, 이런 상황이라면 너라도 이해하기 힘들 거야. (너는 늘 이성적이고 현실적인 사람이니, 그저 이런 기이한 현실을 납득하기가 어려울 테지. 그러니 네가 이렇게 흔들리는 이유는 저의 부재와 네 손에 들린 국화꽃 따위가 아니었다.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느릿하게 눈을 감았다가 떴다.) 그래, 이건 꿈이야. 너를 만나고 싶어서 네 꿈 속에 들어왔어. 이제 기분이 좀 나아?
살로메 V. 헬레니아:(현실의 논리와 이론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비현실이 가득한 이 곳에서 도망쳐 눈을 뜨고 꿈에서 깬다면 다시금 상실에 괴로워할까. 한여름의 신기루처럼 나타났다 사라진 그리움을 언제까지고 끌어안은 채...) ...이렇게까지 생생한 꿈은 처음이네요. 기껏 만났는데 비 내리는 흐린 날인 게 조금 아쉽지만... (저를 만나고 싶어 왔다는 네 말이 못내 기뻐 보일 듯 말 듯 메마른 웃음을 터뜨린다.)
루보르 C. 베스페르티니:비가 온다고 해서 너나 나나 달라 지는 건 없잖아. (웃음소리가 빗물 속에 녹아 들어간다. 더 오랫동안 있다간 결국엔 거짓 뿐인 신기루마저 그리워 할 것 같아 몸을 일으켜 버스의 벨을 누른다.) 자, 이제 내리자. 도중에 길을 잃지 않도록, 네가 가야 할 목저지까지 내가 바래다줄게.
그 말을 끝으로 버스는 곧 첫 번째 정류장에 정차합니다.
살로메 V. 헬레니아:기왕 만난다면 햇살이 내리쬐는 파란 하늘 아래서 만나고 싶었어요. 전부 무슨 소용이겠냐만은... (고개만 끄덕이며 네 움직임 하나하나를 가만히 눈으로 뒤쫓는다. 꿈이란 건 언제나 갑자기 깨어 금방 기억 속에서 사라지는 것이니, 조금이라도 더 많이 안고 가야 그나마 덜 아프지 않겠어...)
루보르 C. 베스페르티니:그런 걸 좋아하는 줄은 몰랐네. (괜히 먹구름이 가득한 회색의 하늘을 바라보고 버스의 뒷문을 통해 내려온다. 저라면 그런 헛된 꿈 따윈 쫓지 않을 텐데. 가득 안을 수록 비어졌을 때 더 허전한 법이었다.)
살로메 V. 헬레니아:(분명 같은 곳에 있음에도 들려오는 네 목소리가 꼭 물 속에 잠긴 것처럼 제대로 들리지 않는다는 생각을 한다. 그게 또, 갑자기 나타났던 것처럼 말없이 사라질까 불안해서... 쓰게 웃고는 네게로 시선을 옮긴다.) 하얀 국화꽃의 꽃말은 성실과 진실, 감사이던가요. 다른 색의 국화들은 또 다르겠죠.
지능
기준치:
90/45/18
굴림:
64
판정결과:
보통 성공
그래요,
국화꽃의 꽃말은 분명 ‘감사함과 진실함’이었죠.
루보르 C. 베스페르티니:...잘 알고있네. (둘과 참 어울리지 않는 꽃이라 생각하고는 시선을 돌려낸다.) 다음 버스가 올 때까지는 아직 시간이 남은 것 같은데, 앉아서 기다리지? (젖지 않은 벤치 쪽으로 고갯짓한다.)
원목으로 만들어진 평범한 나무 벤치입니다.
지붕이 하늘에서 쏟아지는 빗물을 막아주는 탓에 젖은 부분 없이 바짝 말라 있습니다.
버스가 도착 할 때까지 벤치에 앉아 쉬어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살로메 V. 헬레니아:그런데, 국화꽃의 꽃말은 갑자기 왜 물으시나요? 그런 건 별로 신경도 쓰지 않을 사람이 무슨 바람이 불어서. (벤치에 앉아 국화 꽃다발을 내려놓고는, 앉으라는 듯 빈 손으로 제 옆을 가볍게 두드리더니 표지판을 흘끗 바라보았다.)
루보르 C. 베스페르티니:글쎄, 꿈이란 건 원래 현실과 꽤 많이 다르잖아. (네 오른쪽에 앉는다.) 국화꽃에 대한 건 어디서 읽었어?
간략한 버스 그림이 새겨진 정류장 표지판입니다.
표지판 아래 버스 노선도가 붙어있습니다.
노선도를 확인하면...
평범한 노선도가 아니네요.
아니,
이를 노선도라고 칭해서는 안 될 것 같습니다.
버스 노선을 알리는 안내판에는 노선도 대신
‘색상에 따른 국화꽃의 꽃말’에 관한 내용이 적혀있습니다.
살로메 V. 헬레니아:...그렇네요, 이토록 생생한 꿈이어도... (그렇다면 제 눈 앞의 너도 현실과는 다른 걸까, 어느 곳 하나 제 기억 속의 너와 다를 바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또 한 번 네 부재를 실감하고 문득 서글퍼진다.) 하얀 국화꽃이 어떤 꽃말을 가지고 있길래 떠나간 이를 애도하고 추모할 때 손에 드는지 궁금해서요. 어디서 읽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아도 그리 찾기 어려운 내용도 아니니 별 상관은 없을 것 같지만. (노선도의 내용에 고개를 갸웃거리고는 다시 한 번 찬찬히 읽어내려간다.)
루보르 C. 베스페르티니:(네 감정들은 빗물에 번져 저마저 서글프게 만드는 것만 같았다. 그러면 네게 전하고 싶었다. 상실을 겪은 건 너 뿐만이 아니라고. 그러니 너 혼자만 그렇게 세상이 무너진 듯한 표정을 짓지 말라고. 입 속에서 가시 돋은 말들이 맴돌았다. 차마 내뱉지는 못하지만 입안이 까끌거렸다.) 그렇다면 오늘 네가 그 꽃다발을 들고 있는 이유는 애도하고 추모하기 위해서겠네. 그런 것들에 의미를 두는 지는 몰랐지만....
살로메 V. 헬레니아:(죽은 이는 꿈을 꾸지 않는다. 그렇다면 저를 다시 만난 너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꿈에서 깨어나면 그 기억을 안고 살아갈 수라도 있는 저와는 달리 거기서 끝이 아니던가. 그래도, 조금이나마 기쁘다 생각해주면 좋을텐데...) ...그럼요, 정작 이 꽃다발을 받아야 할 사람은 지금 제 눈 앞에 있지만. ...변덕을 부려도 괜찮지 않나요, 가끔은... (말끝을 흐리고 네 어깨에 기대어 눈을 깜박였다. 칠이 벗겨져 알아보지 못하는 노선도에 시선을 둔 채, 영영 그치지 않을 것처럼 끊이지 않는 빗소리에 너의 목소리가 녹아드는 것에만 귀를 기울였다.)
살로메 V. 헬레니아:(피곤했나... 벌써 두 번이나 머릿속을 헤집고 지나가는 이명에 얼굴을 찌푸리고는 네 옆에 앉았다. 이번에는 조금 흔들리더라도 꽃다발을 떨어트리지 않도록 고쳐 안았고,)
당신은 품에 안고 있던 국화가 일전보다 생기를 잃었음을 눈치챕니다.
마냥 하얗던 꽃 잎 끝이 짓밟힌 듯 옅게 시들어 있습니다.
루보르 C. 베스페르티니:(꽃다발을 흘긋 보고는 다시 널 두눈에 담는다. 내가 없는 동안 어떻게 지냈냐고 물으려다 입을 다물었다. 너라면 분명 혼자서도 씩씩하게 잘 지냈을 것 같았다. 답지 않게 단어들을 고르고 다시 골라 흘러보낸다.) 내가 없는 동안 나를 생각했어?
살로메 V. 헬레니아:(그 어느 때보다 싱그럽게 피어있는 꽃다발을 놓고 오고 싶었는데. 그새 시들어버린 꽃잎을 아쉽게 매만지던 손길이 네 물음에 우뚝 멈추었다. 아마 너를 생각하지 않았던 적이 더 드물 터였다. 사람은 늘 곁에 있을 때는 그 소중함을 모르고 잃고 나서야 눈물짓는 법이었고, 저 또한 별반 다를 것 없었으므로. 무어라 말하려 달싹이는 입술이 몇 번이고 다물어지기를 반복하고, 그 새로 빗소리만이 가득한 정적이 가득 찰 때 즈음에서야 입을 연다.) ...당연하지 않나요. 홀로 서는 것이 당연했던 시절을 잊을 정도로, 스스로의 나약함을 경멸하다 못해 익숙해질 정도로. 몇 번이고... ...
루보르 C. 베스페르티니:(예상치 못한 답에 살짝 눈을 크게 뜬다. 다시 만나서 지금까지 네가 보여준 행동과 말투에서 묻어나는 감정들은 하나같이 너와 어울리지 않는 것들이었다. 지금의 저와 마찬가지로. 어쩌면 정말 꿈을 꾸고 있는 건 저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게 어떤 의미인지는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했지만.) ...그럼 이번 기회를 통해서 홀로 서는 방법을 다시 깨우치면 되겠네. 내가 보기엔 넌 그렇게 나약하지 않거든.
살로메 V. 헬레니아:...그럴 수 있다면, 좋겠네요. (말하면서도 스스로에게 의문이 들었다. 과연 그럴 수 있을까? 지금도 이 꿈이 언제 부서져 무채색의 현실로 돌아가게 될 지 마음속 한 켠으로 두려워하는 제가 있는데. 저보다 훨씬 담담해보이는 너는 알고 있을까.) 알려주실 건가요? 홀로 서는 방법을.
루보르 C. 베스페르티니:네가 그것을 물으니 우습긴 하네... (너를 내려다본다. 네 질문에 대한 대답은 네가 가장 잘 알고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간단하지. 그 어느 것에도 마음을 주지 않으면 돼. 그러면 주변이 하나 둘 씩 무너져가도 딱히 붙잡을 필요가 없어지거든. (덤덤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살로메 V. 헬레니아:후후, 따지고 보면 당신 탓도 어느 정도 있는 걸요. ...안됐네요. 이미 마음을 줘 버린 사람이 있어서. (네 얘기를 듣고 힘없이 웃는 양이 씁쓸하다. 역시 처음부터 그 누구도 제 울타리 안으로 들여서는 안 되는 거였다. 비는 이미 그쳤는데, 왜 저는 하염없이 젖어들고만 있을까, 왜......)
루보르 C. 베스페르티니:...왜? (아까부터 들었던 의문점을 결국 내뱉는다. 그저 흥미로 시작된 관계 아니었냐고 덧붙이곤 입을 다물었다. 네 마음도, 제 마음도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 였다. 본인은 이유를 알지 못했지만.) 안타깝게 됐네, 그 마음을 받을 사람이 죽어버려서. (목적지를 잃은 마음은 결국 어디로 향하게 될까.)
살로메 V. 헬레니아:(힘을 잃고 꽃받침에서 떨어지기라도 할 것만 같이 시들어 가는 꽃잎을 손끝으로 가만히 문지른다. 분명, 버스에서 사고가 났던 것 같았는데... 생각해보면 이렇게 네 목소리를 다시금 들을 수 있는 것부터가 현실보다는 꿈결에 가까울 테니 그렇게 의아할 일도 아니었을까.)
...깜박, 잠이 들었던 모양이네요. (나쁜 꿈을 꾼 것 같다 덧붙이며 너와 비 내리는 풍경을 여상히 바라본다.)
아까 전의 사고는 역시 꿈이었던 걸까요?
그렇지 않고서는 이렇게 멀쩡할 수가 없을 테니,
아무래도 질 나쁜 꿈이라도 꾼 모양입니다.
루보르 C. 베스페르티니:(마주하던 시선이 빗물에 비스듬히 흐트러진다. 너와 나 사이에 존재하는 국화꽃이 이 시간을 증명해주는 것과도 같았다. 그러니 흘러나오는 목소리조차 흘러내리는 비와같이 단조로웠다.) 피곤하면 더 눈 붙이고 있어. 다음 버스가 올 때까지는 아직 시간이 남은 것 같으니까.
그렇게 말하는 루보르의 목소리는
어딘지 모르게 지쳐있는 것만 같다는...
이유 모를 생각이 듭니다.
[관찰] 판정이 있습니다.
살로메 V. 헬레니아:
관찰력
기준치:
85/42/17
굴림:
67
판정결과:
보통 성공
(입꼬리 끌어올려 웃으며 습기 가득해 축축한 공기를 폐부 한가득 머금었다 내뱉는다.) 아뇨. ...모처럼인데, 그저 잠으로만 보내기에는 아깝잖아요? (시간이 지나 너에 대한 것들이 잊혀져 감에 충분히 괴로워 하였다 생각했는데, 그럼에도 지금의 네가 어딘가 지친 것 같다는 감상을 못내 떨칠 수 없는 것에 묘하게 속이 일렁인다.) ...피곤한가요?
루보르 C. 베스페르티니:(왼쪽 손을 뻗어 희미하게 미소짓는 입가를 어루어만진다. 거친 손이 감히 건드릴 수도 없을 만큼 부드러운 살결이었다. 꿈이라해도 이렇게나 감각이 선명했다.) 억지로 웃을 필요 없는데. (네 말대로 아까운 시간이니까. 조용히 덧붙이곤 손을 물린다.) 그러면 하고 싶은 걸 말해봐. (너랑 있으면 늘 피곤해. 농담인지 진담인지 모를 목소리로 대답한다.)
살로메 V. 헬레니아:기껏 만났으니, 웃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어요. (깨어나면 눈이 녹듯 사라질 꿈일 뿐인데 이렇게까지 모든 풍경이, 감상이 선연할 일인가. 네 손 위로 가볍게 손을 겹쳤다 다시금 내려놓고는 여린 입술만 짓씹었다. 어차피 깨어날 꿈이라면, 후회하지 않도록...) ...글쎄요, 하나도 기억이 나질 않네요. 하고 싶었던 것도, 하고 싶었던 말도 많았을 텐데. (그것마저 저로 인한 것이라 생각하니 내심 만족스러워 후후 소리내어 웃었고,)
루보르 C. 베스페르티니:(이제는 어느정도 네 웃음이 진심인지 아닌지는 구분할 수 있게 되었지만, 그 웃음 속에 담긴 이유는 머리를 어찌 굴려봐도 이해할 수 없을 때가 많았다. 넌 재회한 그 순간부터 지금까지 웃고만 있었다.) 다시 못 만날 것처럼 말하네. (한순간 네 손이 겹쳐지고 떨어지는 순간 속을 일렁이던 감정의 정체를 알아차린다. 아쉬움이었다. 떨어지는 빗물이, 떨어지는 네 손길이. 그 찰나가 아쉬웠다.) 다시는 안 웃을 것처럼. (만족스럽다는 듯 소리내어 웃는 네 모습을 이해할 수 없다는 눈초리로 바라본다.) 손이라도 잡을까. (그 어느 평범한 연인과도 다름없이.)
살로메 V. 헬레니아:부디 이해해 주세요, 다시금 헤어지게 되는 순간에도 웃고 있을 자신은 없으니... (이번이 꼭 마지막이라는 법은 없지만서도 눈을 뜨는 순간 곧 사라질 신기루와 같은 시간 속에서 그렇게 다음을 확신할 수 있음이 그저 너의 무모함이었을까, 저의 바람이었을까.) 제가 당신을 잊는 날이 곧 마지막이 되겠죠. 처음에는 당신의 목소리가, 그 뒤로는 햇빛을 머금은 눈동자의 빛깔이, 언젠가는 당신의 얼굴조차도 사진 없이는 떠올리지 못할 정도가 되어서... (아무리 잊지 않으려 발버둥쳐도 시간의 흐름은 인간을 망각의 동물로 만들고, 그것은 언제나 잔인한 면이 있어 차라리 전부 잊는다면 그리워 할 것 또한 없을진대 언제나 그리움의 여지를 남겨두고 가는 것이다.) 만약 제가 다시는 웃지 않게 된다면 그건 당신 때문일 거예요. (네 말에 가만히 손을 내미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한다.)
루보르 C. 베스페르티니:(너와의 관계가 연인으로 발전된 이후 저에게는 제법 큰 변화가 있었다. 항상 잊혀지고 싶지 않았는데 너에게 만큼은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 되고 싶었다. 만남은 결국 이별이 되니까. 너와 나는 그것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우리는 끝을 바라보고 살 수 밖에 없었다 보다. 선을 긋고, 지우고, 새로 긋기를 반복하며. 이어지는 네 말을 그저 고요히 듣기만 했다. 할 수 있는 것이 고작 그런 것 밖에 없었다.) 그게… 슬퍼? 나를 잊는게? 다시는 안 웃을 것처럼? (오랜 침묵 후 겨우 물어본 질문에 어떤 대답을 원했는지 몰랐다. 그저 혼란스러움이 담겨있었다. 주어진 네 손을 한참 바라보다가 붙잡는다. 그 틈으로 전해진 떨림이 네 것인지 본인의 것인지 확신하지 못한 체.)
손을 마주잡고,
고개를 듭니다.
그러면 당신은 벽면 상단에 고정되어있는 버스 도착 안내 전광판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여느 버스 정류장에서도 볼 수 있을 법한 평범한 전광판입니다.
전광판에는 글자가 흐르고 있습니다.
노이즈가 끼어있는 탓에 글자를 제대로 확인할 수 없습니다만,
첫 번째 정류장에서 보았던 전광판에 비해 노이즈가 덜합니다.
살로메 V. 헬레니아:(피를 나눈 가족을 포함한 그 무엇에게도 미련을 가진 적이 없었는데, 언제부터인가 네가 곧 제 미련이었으며 네게 있어 제가 특별한 이였으면 했다. 감았던 눈을 뜰 때마다 기적처럼 너와 다시 만나기를 소망했다. 곳곳에 남은 네 흔적이 한 번도 무너진 적 없던 저를 무르게 해 노을지는 하늘과 어둡게 가라앉은 밤하늘을 닮은 두 눈을 떠올릴 때마다 몇 번이고 처참하게 무너져내렸다. 감았던 눈을 뜨고 문득 상상한다. 잊지 않으려 네 흔적들을 잡히는 대로 그러쥐어 저를 채웠음에도 불구하고 네 모습이 어린아이가 손으로 문질러 형편없이 뭉개진 그림처럼, 기억나지 않는 날을.) ...그럼요, 그렇고 말고요. (속삭이는 목소리에 비인지 눈물인지 모를 물기가 묻어난다.)
(가만히 맞잡은 손에 못 박힌 듯 움직이지 않던 시선을 어렵사리 떼어 전광판을 바라본다.)
살로메 V. 헬레니아:(괜스레 맞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가,) ...루보르. 루보르 캘리 베스페르티니.
루보르 C. 베스페르티니:(슬프다는 네 말에 순간 인상이 찡그려진다. 기분이 좋지 않다는 건 너라면 금방 알아차렸을 것이다. 싫다고, 그러지 마라고. 제발 그냥 날 잊고 살아가라고. 목구멍 끝까지 울컥 차오른 말들이 지금 네게 전해지는 일은 없었다. 너에게 구걸하는 모양이 될 것 같아서였다. 대신 너와 같이, 맞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살로메 베라 헬레니아.
무겁게 허공을 가르는 루보르의 목소리는,
어째서 이만큼이나 빗물에 수몰될 듯 참담히 젖어 있는지.
루보르 C. 베스페르티니:…잊으라 했잖아. 돌아올 수 없는 이에게 더이상 마음을 주지 마.
루보르가 당신의 이름을 호명하고
얼마 있지 않아 세 번째 버스가 저 멀리서 빗속을 헤치고 다가와 정차합니다.
버스는 지금까지 승차했던 버스와 달리 커다란 2층 버스입니다.
두 사람 앞에 멈춰선 버스의 탑승구가 입을 벌립니다.
[지능] 판정이 있습니다.
살로메 V. 헬레니아:(기껍지 않아 보이는 널 가만히 눈에 담는다. 분명 저 표정을 경계하던 날이 있었을 텐데, 지금은 그마저도... 무언가를 채워 넣은 만큼 나중의 빈 자리가 크게 느껴짐을 결코 모르지 않았다. 온기를 쐬었다면 그 뒤의 찬 바람이 살을 에듯 서늘하겠지. 애정을 쏟으면 쏟는 만큼 그것은 제 목을 조르는 그리움이 될 것이다. 그것을 앎에도 잊을 수 없는 것은, 맞잡은 손을 놓을 수 없는 것은 제가 언제까지나 한 명의 인간이기 때문이겠지. 소나기는 그친 지 오래인데, 왜 저는 아직까지도 하염없이 젖어들고만 있는가...)
지능
기준치:
90/45/18
굴림:
35
판정결과:
어려운 성공
타고 싶지 않아요.
타서는 안 될 것 같습니다.
이유는 알 수 없습니다.
그저 그래서는 안 될 것만 같다는 근원 모를 충동만이 내 안에 가득합니다.
살로메 V. 헬레니아:... ... (웃음기 띠던 얼굴이 작게 일그러지고, 멈춰선 버스를 앞에 두고도 일어날 기색이 없다.)
루보르 C. 베스페르티니:(적막한 공기를 가르고 도착한 버스를 바라본다. 시간은 뒷걸음치지 않았다. 다가오는 순간이 두렵다면 제가 먼저 다가가면 될 일이었다. 지금은 무엇이 널 머뭇거리게 만드는 걸까. 가만히 앉아있는 네 모습을 의아하게 바라본다.) 왜 그래?
그 이유 모를 낯선 충동은
빗물보다도 잘게 흐드러져 떨어지는 루보르의 목소리에 흔적도 없이 녹아 사라집니다.
아까까지만 해도 숨통을 조르고 익사시킬 듯,
나를 쥐고 흔들었던 불안감마저도 깨끗이 씻겨 내려가는 듯합니다.
그저 온 세상을 적시는 빗소리와
끝없는 안정감만이 두 사람 사이에 존재합니다.
살로메 V. 헬레니아:...아, 꽃다발이 더 시들지는 않았는지 보고 있었어요. (아무렇지도 않게 변명하며 일어선다. 네 물음 하나로 이렇게까지 안정되는 것이 못내 슬퍼 헛웃음만 내뱉었다. 아직까지도 네가 필요한 모양이지, 바보같게도...) ...갈까요.
루보르 C. 베스페르티니:죽은 건 계속 시들어가는 게 당연하잖아. (대수롭지 않은 듯 말했다. 시드는 게 아쉬웠다면 애초에 꺾지 말았어야했다.) 가야지. 일어나자. (먼저 일어나서 네 손을 잡아 이끈다.)
살로메 V. 헬레니아:싱그럽게 핀 꽃다발을 놓고 싶었는데, 아쉽네요. (제가 시간을 너무 끌었는지도 모르겠다 덧붙이고는 고개 끄덕이며 네가 이끄는 대로 발을 옮긴다.)
살로메 V. 헬레니아:(여전히 비어있는 운전석을 보았다가, 굳게 잠긴 자물쇠 쪽으로 시선을 옮긴다.)
관찰력
기준치:
85/42/17
굴림:
96
판정결과:
실패
당신은 안고 있던 국화가 일전보다 훨씬 더 생기를 잃었음을 눈치챕니다.
갓 생명을 피워낸 듯 하얗고 투명하던 꽃잎은,
이제 그저 계절을 잃은 이름 모를 들꽃처럼 보여요.
단지 몇 송이의 국화만이 처량히 바래진 꽃잎의 색을 발할 뿐입니다.
루보르가 먼저 창가 좌석에 앉습니다.
그를 따라 옆좌석에 앉습니다.
루보르는 어쩐지 묘하고 멍해 보이고,
지친 듯, 혹은 침체되어 있는 듯한 분위기를 풍깁니다.
살로메 V. 헬레니아:(끝이 갈색으로 바랜 국화 꽃잎을 손으로 쥐었다 놓는다. 아무리 꺾인 꽃이라 하여도 이렇게 빨리 시들 건 없는데.) ...지쳤나요? (대뜸 그리 묻는 목소리에 얼핏 초조함이 드러난다. 줄곧 이어지는 비와 흐린 하늘 아래 기분이 가라앉는다 해도 이상할 것 없으나, 네가 금방이라도 떠나거나 사라질 것만 같아 문득 불안해진 탓이다.)
루보르 C. 베스페르티니:(빗물이 주륵주륵 흐르는 유리창은 마치 깨진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 너머로 버스가 움직임과 함께 흔들리는 풍경을 바라본다. 잠깐 정신이 아득해졌다가 네 목소리에 너에게 초점을 맞춘다.) 그래보여? (흔들리는 목소리에서 네 초조함을 느끼고 묻는다.) 뭐가 그리 불안할까. 벼랑 끝에 내몰린 사람처럼...
살로메 V. 헬레니아:(감았던 눈을 뜨고는 가만히 네 안색을 살핀다. 저를 바라보며 묻는 네가, 금방이라도 빗물 속으로 가라앉아 사라질 것만 같아 일순 네 손을 잡았다 놓았다.) 그럼 제가 괜히 그런 말을 했을까요? 조금이나마 눈을 붙이시는 건 어떤가요, 다음 정류장에 도착하면 제가 깨워드릴테니... (마지막 물음에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당신이, 금방이라도 사라질 것 같아서... ...
루보르 C. 베스페르티니:(홍옥을 닮은 눈동자에서 슬픔을 느낄 수 있었다. 피곤해서라기 보단 그것을 계속 마주할 수 없을 것만 같아 창가에 머리를 기대고 두 눈을 감는다. 네 대답에는 부정하지 않았다.) ...기대를 하면 안돼. 그 벼랑 끝에 뭐가 있는지 알고 있잖아. (우리 둘 다. 나지막이 내뱉고 입을 다물었다.)
[관찰] 판정이 있습니다.
살로메 V. 헬레니아:(제게서 시선을 돌린 채 눈을 감는 네 옆 얼굴을 바라보다 말없이 시선을 떨군다. 돌아오지 않는 부정이 살을 에는 칼바람처럼 시리고 쓰렸다.) 알아요. 하지만 기대를 버리기 전에 어리광 정도는, 부릴 수 있는 거잖아요... ...
관찰력
기준치:
85/42/17
굴림:
37
판정결과:
어려운 성공
좌석 바닥에 떨어져 있는 책을 한권 발견합니다.
책이라기보다는 얇은 책자에 가까워 보입니다.
푸른색의 표지에는 아기자기한 회전목마 그림이 프린트되어 있습니다.
놀이공원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화려하고도 쓸쓸한 푸른 대낮의 회전목마네요.
제목은 《merry go round》
...메리 고 라운드.
회전목마를 지칭하는 단어입니다.
살로메 V. 헬레니아:(몸을 숙여 책자를 주워 들고 소리가 나지 않도록 조심스레 표지를 넘긴다. 누군가 떨어트렸다기에는 기사도 없는 버스를 달리 탈 사람이 있을지 의아해 고개 슬 기울였고,)
표지를 넘기면 다음과 같은 내용을 읽을 수 있습니다.
책자의 내용을 살핀 직후 당신은 강한 현기증과 함께 정신을 잃습니다.
빛도 한줄기 들지 않는 맨 밑바닥의 어둠 속에서,
당신은 환각을 마주합니다.
환각 속에 삶에서 가장 기뻤던 순간,
가장 슬펐던 순간,
죽어서도 잊지 못하리라 여겼던 반짝이던 삶의 조각,
어느 순간 그 삶에 뿌리를 내리고 침범한 루보르와의 첫 만남.
... 단 한가지도 빼놓을 수 없는 여러 기억이 스쳐 지나갑니다.
함께 맛있는 것을 먹었던 기억,
서로의 어린시절 물건들을 나누었던 시간,
서로에게 밤인사를 나누고,
또다른 이별을 나누고 함께 아침을 맞이했던 추억.
다른 이들과 다같이 호텔에 묶었던 날.
고조 되는 행복감에 웃어버렸던 순간.
한동안 빠른 속도로 영상이 스쳐 지나가고
잠시간 필름이 뚝 끊기며 말간 어둠이 지속됩니다.
주위를 둘러보아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문득,
다시금 빛처럼 터져 나오는 영상이 하나.
두 사람의 모습입니다.
살로메와 루보르,
두 사람은 버스를 타고 함께 어디론가 향하고 있습니다.
두 사람은 어떤가요?
두 사람 사이의 공기가 차갑습니다.
좁아지지 않는 의견 차이,
분명 즐거워야할 데이트 날이어야 했는데...
그날도 다투고 있었군요.
순간 찾아온 정적.
고즈넉한 빗소리의 향연도 잠시,
쾅―!!
반대편 차선을 지나치던 트럭과 버스가 갑작스레 충돌합니다.
직후 들려오는 것은 커다란 굉음.
쇠가 굽어들고 절단되는 듯한 소름 끼치는 금속음.
무언가 터지는 소리, 날아가는 소리,
어딘가에 들이박는 듯한 충격.
온몸의 뼈가 부러지고,
근육이 찢겨 나가는 듯한 생생한 통증.
쉼 없이 흔들리고 요동치는 어두운 화면 사이로
그런 당신을 한 점 망설임 없이 끌어안는 누군가가 있었습니다.
당신은 강한 힘으로 끌어안깁니다.
아니, ‘누군가’라고 특정할 필요도 없습니다.
루보르입니다.
루보르가 억센 힘으로 살로메 베라 헬레니아,
당신을 끌어안았습니다.
…….
암전하는 버스의 내부를 어둡게 띄우며 필름이 또 한 차례 뚝 끊겨 나갑니다.
떠오르는 영상의 날짜는...
1년 전의 오늘입니다.
아,
그제야 지금까지 서리가 내린 듯 희뿌옇기만 하던
기억 하나가 마치 퍼즐 조각처럼 달라붙습니다.
1년 전의 사고가 떠오릅니다.
1년 전,
돌이킬 수 없는 사고의 현장에 존재하던 것은 루보르만이 아니었습니다.
루보르와 살로메 베라 헬레니아.
두 사람이 함께 있었습니다.
‘나’를 제외한 탑승객 전원이 사망했던 그 참담한 사고의 현장에서,
루보르는 당신을 끌어안고 죽었습니다.
오로지 당신을 살리기 위해,
본인을 희생시켜서요.
이건...
주마등인가요?
그래요.
이건 주마등입니다.
[이성] 판정합니다.
살로메 V. 헬레니아:... ...
SAN Roll
기준치:
89/44/17
굴림:
15
판정결과:
극단적 성공
이성 -1
일순 강한 충격과 함께 주마등이 돌아가던 공간이 산산이 부서져 내립니다.
[듣기] 판정합니다.
살로메 V. 헬레니아:
듣기
기준치:
70/35/14
굴림:
1
판정결과:
대성공
삐―――.
무너져 내리는 공간 속에서,
조금은.
길게 이어지는 기계음을 들었던 것도 같습니다.
꼭 말단부위부터 심장까지 강한 전기가 흘렀다 사라지는 것만 같은 감각.
이윽고 모든 것이 바닥까지 묵직하게 가라앉고 맙니다.
끊임없이 퍼붓는 빗소리에 한데 뒤엉켜 있던 환각들 또한 함께 수몰됩니다.
귀를 먹먹히 침수시키는 낙수음.
당신은 흔들리는 버스 좌석에 앉은 채 눈을 떠올립니다.
기억났습니다.
떠올렸습니다.
1년 전의 그 날,
루보르는 나를 끌어안고 대신 죽었던 겁니다.
고개를 돌리면 루보르는 창가에 머리를 기댄 채 곤히 잠들어 있습니다.
덜컹.
버스가 방지 턱을 밟고 흔들립니다.
머리가 어지럽습니다.
그에 맞춰,
짤그랑.
무언가 바닥으로 떨어지는 미약한 금속음이 들려옵니다.
살로메 V. 헬레니아:... ...하, (어지러운 머리 애써 갈무리하고 한참을 너만 바라보다, 짓씹듯 혼잣말 내뱉는다.) 왜, 어째서... 바보같이......
(헛웃음만 지으며 바닥 내려다본다.)
바닥을 살피면 회전목마 고리가 달린 작은 열쇠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살로메 V. 헬레니아:(잠든 네 뺨에 입술 가벼이 내리누르고, 열쇠 주워 든 뒤 일어나 자물쇠로 닫힌 문으로 향한다.)
닫혀있는 입구의 문에는 커다란 자물쇠가 걸려있는 것이 보입니다.
자물쇠에 아까 얻었던 열쇠를 끼워 넣으면
금속이 맞물려 들어가는 소리와 함께 버스 2층이 개방됩니다.
–
–
버스의 2층으로 들어서면,
그 장소는 이상하게도 단출한 방과 같은 형식을 하고 있었습니다.
곳곳에 자리하고 있는 차창에서
물기를 머금은 탁한 빛이 터져 나와 내부를 은은히 비추고 있습니다.
내부에는 책상과 책장,
그리고 침대 하나가 놓여있네요.
책상과 책장, 침대를 살필 수 있습니다.
살로메 V. 헬레니아:(감았던 눈 뜬 채 무표정으로 책상을 훑는다.)
깔끔하게 정돈되어있는 책상 위에는 그 흔한 필기도구도,
책도, 사용감도 그 무엇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세월의 흔적이 느껴지지 않습니다.
그 흔한 먼지 하나조차 쌓여있지 않네요.
말끔하다 못해 쓸쓸해 보이는 책상 한가운데 반으로 접혀 있는 쪽지만을 한 장 발견합니다.
쪽지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살로메 V. 헬레니아:(몇 번인가 눈 슴벅이다 쪽지 한 손에 쥔 채 책장을 살핀다.)
책장에는 책이 한가득 꽂혀 있지만,
그 어느 것도 당신이 읽을 수 없는 것들뿐입니다.
검은색의 책등만이 마치 밤하늘처럼 빼곡히 즐비합니다.
자료조사 혹은 관찰 판정합니다.
살로메 V. 헬레니아:
관찰력
기준치:
85/42/17
굴림:
83
판정결과:
보통 성공
책들 사이에 꽂혀있는 쪽지를 한 장 발견할 수 있습니다.
쪽지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그러고보니...
루보르가 당신의 이름을 호명하고 난 후,
버스가 도착했었죠.
살로메 V. 헬레니아:... ...당신이란 사람은, 정말... (쓴웃음 지으며 침대로 향한다.)
살로메 V. 헬레니아:(비에 젖어드는 너를 잔뜩 떨리는 시선으로 마주한다. 젖으면 안 되는데, 우산을 네 쪽으로 기울이라고 말해야 하는데... 무언가 틀어막기라도 한 것처럼 목이 메인 탓에 고개 떨구고 빗물 머금은 숨만 들이쉰다. 어째서 저를 감싼 것인지, 정말 제가 아는 네가 맞는지, 맞다면 어째서 제 이름을 부르지 않는 것인지... 애써 웃으며 고개 들자 잔뜩 억눌린 목소리가 새었다.) ...좋은 밤이죠, 내 사랑... ...
루보르 C. 베스페르티니:(너에게는 이 빗물의 무게가 너무나도 무거워보였다. 제가 잠깐 잠들어있는 동안 무슨 일이라도 있었던 걸까, 당장이라도 빗물에 침제되어 익사할 것 같은 네 모습을 바라보다 입을 연다.) 목적지가 바뀌었어. 처음에 했던 말 기억 나? 도중에 길을 잃지 않도록, 네가 가야 할 목적지까지 내가 바래다주겠다고 했잖아. (흘러나오는 목소리는 여유로웠다.) 건너편 정류장으로 넘어가자. 전해야 할 말이 있어.
살로메 V. 헬레니아:(손 뻗어 다시금 우산을 네 쪽으로 기울이고는 제 이름을 부르지 않냐고 물으려던 것을 목구멍 뒤로 눌러 삼킨다. 조금이라도 더 함께 있을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으니... 끊이지 않고 이어지는 빗소리와 발 밑으로 고이는 빗물 머금어 축축한 공기... 금방이라도 빗물에 잠길 것 같아 호흡이 버거운 탓에 작게 숨 고르고는 고개 끄덕인다. 네가 어디로 향하든 간에 모든 것이 기꺼울 테다.) ... ...네, 가요.
루보르 C. 베스페르티니:(너는 그렇게 할 말이 많은 표정으로 최소한의 말을 이어갔다. 당장이라도 숨이 멎을 듯, 넌 단어들 사이로 호흡을 찾았다. 그 모습이 못내 안타까웠다. 안타까워서. 차라리 입을 맞추고 네게 숨을 불어넣어주고 싶었다. 그런데 넌 그것마저 버거워보여 차라리 널 업고 가는 게 나을 것 같단 생각도 했었다. 가만 내려다보다 네가 잘 따라오길 바라며 몸을 돌렸다.)
두 사람은 천천히 반대편 정류장을 향해 이동합니다.
발끝을 적시는 빗물은 차가울까요.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아요.
그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야 지금 당신이 집중해야 할 존재는 그저 루보르 단 한 사람뿐이니까요.
살로메 V. 헬레니아:(많은 말은 언제나 화를 부른다, 그렇기에 많은 생각들을 고르고 골라 가장 필요한 말들만 뱉는 것이 버릇이 되어 있었다. ... ...하지만, 아쉬운 것이 있다면 그 또한 언제나 밖으로 내뱉지 않은 채 담아두고 숨기는 말들에만 꽃이 피었던 것이다. 내뱉는 말들은 의지하려 해도 어긋나고 미끄러지는 평행선이었음을 깨닫지 못한 채... 한발짝 뒤에서 걸음을 옮기며 있지도 않을 다음을 기약했다.)
루보르 C. 베스페르티니:(숨기는 말들에만 꽃이 피었다면, 가장 화려하게 봄을 수놓고 봄비에 한없이 부서지는 너는 벚꽃과 닮아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너는 저에게 삶의 덧없음과 아름다움을 선물했다. 그런 너에게 제가 해줄 수 있는 건 고작 이런 것 밖에 없었다.) 1년 전 오늘, 너와 함께 타고 있던 버스가 빗길에 미끄러진 트럭과 충돌하는 사고가 있었어. (너와 발을 맞추어 걸어갔다. 우리는 나란히 평행선을 걷고 있었다. 같은 곳을 바라보지만 결코 교차점이 있을 수 없는 평행선을. 누군가가 부수고, 비틀고, 망가지고 나서야 겨우 마주할 수 있었다.) 나는 사망했고, 너는 1년째 혼수상태에 빠져 있는 상황이야. 점점 죽음에 가까워져 가는 너의 영혼은 삶의 경계를 벗어 났어. (시선은 네가 아닌 빗물너머 멀리 존재하는 정류장을 향했다. 흔들리는 목소리는 빗소리에 묻혀지길 바랐다.) 내가 각 정류장에서 한 번씩 너의 이름을 불렀던 건, 너를 죽음으로 인도하기 위함이었고.
살로메 V. 헬레니아:(그렇다면 너는 마른 땅과 초목을 적시고 사라지지만 벚꽃을 쓸고 지나가 지게 하는 봄비였을까. 네가 남기고 간 것이 선물이었는지 애증 담긴 저주였는지는 모르나 저를 비참하고 나약하게 만드는 것임에는 확실했다. 그럼에도 너를 원망하지 못하는 것은 그마저도 너의 흔적이라 놓을 수 없기 때문이었다. 이어지는 말에 입 속 여린 살만 짓씹다가,) ... ...저를 감싸고, 말이죠. 바보같이... 왜 그런 선택을 했나요. (제 곁에서 들리는 목소리와 네가 빗물 고인 땅을 딛으며 찰박대는 소리, 생자처럼 숨을 내뱉고 들이쉬는 소리 그 모든 것을 무엇보다 선명히 들으려 귀 기울였다.) 그렇다면 어째서 제 이름을 부르지 않나요? 이번이 마지막이지 않나요. 저를, 죽음으로 인도하기 위한...
루보르 C. 베스페르티니:(웃기지. 이런 방식으로도 사람이 한없이 나약해질 수 있다는 게. 아니면 인간은 애초에 나약하게 태어나는 걸지도 몰랐다. 작은 인연들을 통해 겨우 삶을 지탱하고, 작은 충격에도 무너지니까. 적어도 저는 그랬다. 감쌌다는 네 말에 미간이 좁아진다. 우산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착각이라도 했나 봐. 아니면 그렇게 믿고 싶은 건가. 내가 네 이름을 불러주면 좋겠어? 난 네가 죽길 바랐어. 죽길 바랐는데…. 신은 널 삶으로 돌려보내고 싶어하는 것 같네. (신을 만난 순간 왜 항상 나의 것을 빼앗아만 가냐고 소리치고 싶었다. 그런데 그 순간 마저도 감사하다고 무릎 꿇고 빌 수 밖에 없으니, 참 기구한 생이지. 곁눈으로 빗물을 한껏 머금은 국화꽃을 바라본다.) 그 국화꽃은 네 생명 그 자체야. 꽃다발을 들고 버스에 올라. 그러면 다시 삶으로 돌아갈 수 있어.
루보르가 말을 끝마침과 동시에 두 사람은 건너편 정류장에 도착합니다.
당신은 숨이 막혀옵니다.
억만 겁의 슬픔 탓일까요,
아니면...
그렇게 말하는 루보르의 표정에서 처음 보는 웃음을 보아서 였을까요.
이성 확인합니다.
살로메 V. 헬레니아:
SAN Roll
기준치:
87/43/17
굴림:
28
판정결과:
어려운 성공
이성 -1
문득 루보르의 어깨너머로 희미한 불빛이 들어오는 전광판이 보입니다.
전광판의 메시지는 우리가 원래 앉아있던 반대편 정류장의 전광판 메시지와 그 내용이 상이합니다.
살로메 V. 헬레니아:(하, 헛웃음이 터지는 것을 참지 못하고 자조 가득한 어조로 말을 잇는다.) ...그렇다면 차라리, 내버려두지 그랬어요. 그때 저를 어딘가로 밀치기라도 하지 그랬어요, 제가 눈을 뜨자마자 이름을 불렀으면 좋았잖아요. 그랬다면 당신이 바라는 대로 됐을 텐데. 이렇게까지 무너질 일도, 스스로의 나약함을 원망하고 괴로워하며 아파할 일도... (없었을 텐데. 꾹 눌러 참았던 눈물이 터져 미처 내뱉지 못한 뒷말은 그 속으로 녹아들어 사라진다. 시들어 색 바랜 꽃다발이 물기 머금은 진흙에 떨어져 더러워지는 것도 상관하지 않고 주먹만 힘주어 쥐었다. 이제 와서 저런 것이 무슨 소용이라고.)
당신은, 당신은 왜 마지막까지 나를 비참하게 해... ...
루보르 C. 베스페르티니:눈 뜨자마자 이름을 불렀으면 너랑 이렇게 대화도 못- (거기까지 말하고 나니 제가 얼마나 너와 다시 대화하길 기대해 왔는지 깨달을 수 밖에 없었다. 순간 시간이 바닥으로 떨어진다.) …그러길 바랐어? 그러면 나를 미워하지 않았을 거야? (우산을 놓치고 비어진 손으로 떨어지는 꽃다발을 주어 네게 다시 건넨다.) 소중히 해야지. 이건 내가 너에게 선물하는 거잖아. (네 입술에서 제 이름이 흘러나올 것 같지 않자 순간 널 바라보는 시선이 매서워졌다.) 내 이름을 말하라고 했어. 어렵지 않잖아. 도대체 이렇게 해서 얻으려는 게 뭔데?
살로메 V. 헬레니아:... ...바보같은 소리. 애초에 왜 이런 곳까지 온 건가요, 제가 죽음을 맞이하는 걸 직접 보고 싶어서? 당신으로 인해 무너져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고 싶었나요? (쏟아내는 말들 사이로 눈물인지 빗물인지 모를 물기가 들러붙는다. 답지 않게 감정이 실린 목소리는 형편없이 갈라진 채다. 이어지는 물음에 허, 하고 헛숨만 내뱉었고,) 제게 미움받는 것이 두렵나요? (지금의 감정은 분명 순수한 애정보다 애증에 가까움에도, 네가 건넨 꽃다발을 뿌리칠 수 없는 것이 서글퍼 비릿한 피의 맛이 돌았음에도 불구하고 여린 입술만 잘근거렸다. 매서워진 시선을 마주하는 눈동자에는 처절하게 무너진 이 특유의 체념이 담겼다.) 죽기를 바랐다면서요. 제가, 죽기를 바랐다고 했잖아요. 제가 당신의 이름을 부르면 무엇이 좋다고, 제가 죽기를 바란 당신이야말로...
루보르 C. 베스페르티니:(울음 사이로 잘도 또박또박 내뱉는다 했다. 네 말에 어떤 대답을 해야할 지 몰랐다. 퍼즐처럼 견고하게 쌓아 올린 네 모습을 결국은 가짜라고 생각했으니, 하나하나 건드려보고 무너뜨리고 싶었던 때가 있었다. 하지만 막상 정말로 무너진 모습을 보니 나락으로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그것이 저 때문이라면 더더욱. 예전엔 어땠을지 몰라도, 적어도 지금은 네가 무너져 괴로워하는 모습은 보고 싶지 않았다.) 두려운 게 아니라—…. (이게 두려움이 아니라면 무엇일까. 하지만 인정하고 싶지 않는 구석이 있었다.) 사서 미움 받을 생각은 없었는데. (널 위해 희생한거라면 더더욱. 뒷말은 삼켰지만, 네 마지막 말에 얼굴이 구겨졌다. 어이가 없다기 보단, 원래의 너라면 절대 안 죽어줄 셈이라고, 더 악착같이 살 거라고 말할 줄 알았다. 무력이나 협박으로 통하지 않겠다는 것을 깨달으면 목소리를 다시 낮춘다.) 진짜 나랑 같이 죽고 싶어? 원래 하던 데로 해. 날 미워하고, 그럴 수록 더 살고 싶다고 해야지.
살로메 V. 헬레니아:... ...하하... 죽길 바랐지만 당신의 손에 제 피가 묻는 것은 싫었나요? 대답이나 해요. 대체 뭐가 좋아서 죽길 바란 사람을 살려 돌려보내려 하는지. (날카롭게 노려보던 눈초리가 마지막 말에 다시금 무너지고, 고개만 도리질치다 가까스로 입을 연다.) 아니, 아니야... 저는, (너를 사랑한 날부터 단 한 번도 진심으로 미워한 적이 없었다고. 말하지 못한 속내가 곪아 문드러진 탓인지 숨이 막혀, 그치려던 눈물이 다시금 뺨을 타고 흐른다. 아니, 눈물이 아니라 하늘에서 내리는 빗물이었던가. 이제는 제대로 분간조차 가지 않았다. 거칠어진 숨을 고르며 힘겹게 내뱉는 한마디가 물 먹은 솜처럼 무겁다.) ...난, 아직도. 당신을 모르겠어... ...
루보르 C. 베스페르티니:그러면 내가 지금까지 한 게 뭐가 돼. (고개가 바닥으로 떨어진다.) 널 살릴 수 있는 걸 몰랐으니까. 마음이 바뀌었어. (저를 모르겠다는 말에 죽음을 맞이했을 때 근육이 찢어지고 뼈가 바스러지던 고통이 한꺼번에 스치고 지나간다. 그와 동시에 견고하게 쌓아 올렸던 벽이 무너지고, 그 속에 널 처음 만났던 어린아이가 울음을 터뜨렸다. 네 앞에 덤덤하게 말하고 행동했던 것이 쓸모가 없을 정도로 무너져 내렸다. 그러니 너에게 국화꽃을 안겨주고 멋대로 입을 맞춘 건 미리 계산했던 일도, 충동적인 일도 아니었다. 입술이 맞물리고 숨이 얽힌다. 호흡이 안정되고 난 후에야 입을 뗄 수 있었다. 몸을 숙여 이마를 맞대고 속삭이듯 말했다.) 내가 너에게 남겨준 게 절망 밖에 없다면, 그래서 네가 이렇게 슬픈 거라면, 기꺼이 네 이름을 불러 줄게. 나와 함께 해서 한순간이라도 행복 했었다면... 나에게 널 살릴 기회를 줘.
살로메 V. 헬레니아:(이대로라면 정말, 숨막혀 죽을 것만 같아... 고개 떨군 채 꾹 깨문 잇새 사이로 새어나오는 억눌린 울음이 섧다. 죽길 바랐다는 말 한마디가, 원래의 저라면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쳤을 말 한 마디가 마음을 갈기갈기 찢어놓아 모든 것이 그저 참담했다. 떨궜던 고개를 겨우 들었을 즈음 맞닿은 입술에 눈물 젖어 일렁이는 눈이 정처없이 흔들리다 이내 내리감기며 고여있던 눈물이 그 끝으로 흘러내린다. 네 온기를 놓치기 싫다는 듯 한 손으로 네 옷자락을 그러쥐었다, 입술이 떨어지고 나서야 살며시 뜨인 눈동자 속에 오로지 너만이 담겼다. 아, 행복했고 말고. 제 나약함이자 애정, 비참함과 행복은 모두 다른 누구도 아닌 너였으니... 이어지는 말에 이마 맞댄 채로 눈꼬리 접어 환히 웃었고,)
그 누구보다 행복했어요, 그렇지 않았을 리가 없잖아요...
사랑해요, 루보르...
루보르.
당신은 떨리는 목소리로 루보르의 이름을 부릅니다.
바람이 붑니다.
온전히 침체된 죽음의 여로 반대편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어깨가 젖어 듭니다.
바람이 이렇게 세차게 불면, 우산도 소용없는 법입니다.
그러니 지금 내 뺨을 타고 흐르는 것은 눈물이 아닌 빗물인 겁니다.
얼마 있지 않아 정류장 앞에 라이트를 켠 버스가 한 대 정차합니다.
버스의 번호는,1225번.
삶으로의 생환입니다.
살로메 V. 헬레니아:(꽃다발 안은 채 한 걸음 내딛으려다, 뒤돌아 한 손 뻗어 네 목 끌어안고 가볍게 입맞춘 뒤 떨어져 버스에 올라탄다. 너를 돌아보며 초승달처럼 휘어진 눈가가 붉다.)
버스의 출입구가 열리면
당신은 흠뻑 젖은 다리에 힘을 실어 그 위에 승차합니다.
당신은 버스에 올라타면 버스의 문이 닫힙니다.
뒷좌석으로 걸어가 창문을 열고,
우산을 든 채 당신을 올려다보는 루보르와 두 눈을 마주합니다.
루보르 C. 베스페르티니:(빗방울이 멈추었다 생각이 든 순간 빗소리를 가르고 내뱉어진 네 대답에 마음이 놓여 저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졌던 것 같았다. 저에게서 멀어지는 네 뒷모습을 아쉬움 가득히 바라보지만, 붙잡지는 않았다. 이제는 별 필요가 없어진 우산을 고쳐쓰고 창문너머의 너를 한참 두 눈에 담는다.) 사랑했어. 너와 함께했던 모든 찰나를. (그 시작이 무엇이었는지 확실치 않았지만 떠나보내는 눈동자에, 목소리에, 손짓에 분명한 애정이 담겨있었으니 담대히 선언할 수 있었다.)